[조선족 대이주 100년 ] 〈2부〉유랑 ① 이산의 바다
다시 낯선 여권이다. 관광버스에 올라탄 브로커는 한국인 여권 18개를 조선족 18명에게 나눠 주었다. 비슷한 생김과 나이를 골라 조선족은 여권 하나씩 손에 쥐었다. 모두 일치할 필요는 없었다. 미국인은 동양인의 외모를 좀체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김연희(가명·50)씨는 여권 사진을 들여다봤다.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건 이것이 마지막 여권이다. 지난 석달 동안, 김씨는 낯선 여권을 손에 쥐고 거듭 국경을 넘었다.
중국을 떠날 때, 김씨는 자신의 여권으로 출국심사대를 통과했다. 홍콩에 도착할 무렵, 브로커는 한국 여권을 김씨에게 건넸다. 공항 입국 심사요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여권에 도장을 찍었다. 낯선 여권은 인도네시아·타이·쿠바를 거쳐 멕시코에 올 때까지 계속 등장했다. 지난 며칠 동안 햇볕 들지 않는 작은 방에 옹송그리고 앉아 김씨는 3만5000달러(약 3800만원)를 들인 이 모험의 성공을 빌었다. 같은 방식으로 멕시코에 도착한 조선족 18명이 방을 채우자 브로커는 버스를 불렀다. 일행은 국경으로 떠났다.
3100여㎞에 걸쳐 있는 미국·멕시코 국경 가운데 어디쯤 와 있는지 김씨는 알지 못했다. “말조심해야 돼요. 한국말과 조선족 말을 구분하려고 (재미) 한국인 요원이 고용됐다고 하니까.” 버스 안에서 브로커가 말했다. 18명의 조선족은 멕시코에 여행온 한국인 관광객으로 보여야 했다. 중국 동북의 억양이 튀어나올까봐 18명은 입을 꼭 다물었다. 7만여명의 조선족이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미국 땅이 코앞이었다. 낯선 색깔의 눈동자를 부라리며 미국인 입국심사 요원이 버스에 올라탔다. 낯선 대한민국 여권을 그에게 건넸다. 메마른 공기의 낯선 땅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뉴욕/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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