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로구 서울조선족교회에서 조선족 여성이 짐이 쌓인 복도를 지나고 있다.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조선족 대이주 100년 〈1부〉뿌리] ③ 잃어버린 청춘
적어도 하루 8만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다른 조선족의 귀띔을 믿고 공장을 뛰쳐나와 공사판에 갔다. “후회하고 있다”고 한씨는 말했다. 매일 새벽 5시 인력시장에 나가도 일거리가 없었다. 하루 5천원만 내면 잠을 잘 수 있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조선족 쉼터에서 한씨는 하루 종일 지내고 있다. 잠을 자거나 술을 마신다. △ 김연희(가명·57살) 김씨의 아버지는 일제 시절 만주로 건너왔다. 한반도 남쪽에 부인과 딸을 두고 혼자 돈벌러 떠나왔다. 해방과 분단을 거치며 한국에 돌아올 길이 막혔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두번째 결혼을 했고, 김씨를 낳았다. 1980년대 후반, 한국과 중국에 흩어진 이산가족 찾기 열풍이 불었다. 아버지는 한국에 두고온 아내와 딸을 찾아냈다. 한국의 이복언니가 1992년 김씨를 초청했다. 이후 불법체류자로 살았다. 김씨는 혼자 한국에 왔다. 장차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려면 돈이 필요했다. 아들과 딸의 뒷바라지를 남편에게 맡겼으나, “한국 들어온 뒤에 연락이 끊겨 지금은 소식을 모른다”고 김씨는 말했다. 남편과 생이별 하게 된 다른 사연이 있겠지만, 김씨는 거기까지만 설명했다. 한국 생활 19년 동안 중국 요녕성 심양에 있는 고향집을 가보지 못했다. 30대 후반에 한국에 와서 어느새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돈 많이 벌어 아이들 교육시켰으니 괜찮다”고 김씨는 말했다. 그는 식당 찬모로 일하며 월 180만원을 받고 있다. 아들은 중국에서 대학에 다닌다. 딸은 한국인과 결혼했다. 경기도 어느 소도시에서 딸네 식구와 함께 9천만원짜리 전세집에 살고 있다. 그 정도 생활이면 김씨는 족하다. 서울 조선족 교회의 도움으로 지난해 정식 비자를 새로 받은 김씨는 앞으로도 중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 이제 와서 고향을 찾는다 해도 그 곳에는 가족이 없다. 가족 단위의 이주는 조선족의 생활 근거를 통째로 바꾸고 있다. 안수찬 기자, 안세희·이상원 인턴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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