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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작은 마을에 모여살던 조선족들 지금은…
남아 있는 이들에게 듣는 ‘조선족 약전’

등록 2011-11-04 22:02

[조선족 대이주 100년 〈1부〉뿌리] ② 손님의 일생
 △ 박선석 (67살)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다 헤진 런닝셔츠를 입고 있었다. 주름 가득한 웃음에는 세상의 환란과 핍박이 남긴 자취가 없었다. 웃을 때마다 그의 이빨 뿌리가 다 드러났다.

격변의 가족사에 휘말린 것은 남자들만이 아니었다. 증조할머니는 만세시위에 참가한 남편이 경찰에 맞아 죽자 그 충격으로 곧 사망했다. 집 떠난 남편이 민생단에 휘말려 죽은 것을 일제 패망 직후에야 알게 된 할머니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사망했다. 정치에 휘말려 시조부모와 시부모를 여읜 어머니는 “절대 싸우지 말아라, 벙어리로 살아라, 그저 살아만 남아라”고 외아들 박씨를 다독이며 살았다.

증조할아버지의 3·1만세운동, 할아버지의 민생단 사건을 말할 때, 그는 잔잔히 말했다. 대약진운동으로 아버지가 당한 수모를 말할 때, 그는 오히려 우스개를 했다. “나는 회의실에 편하게 앉아서 아버지의 자아비판을 들었지. 부농보다는 부농 아들이 (출신 성분상) 더 높으니까, 허허.”

조선족 소설가 박석석.
조선족 소설가 박석석.
그 무렵, 중국 정부는 ‘4해’(네가지 해로운 동물)를 지정했다. 그 가운데 참새도 있었다. 곡식을 함부로 뜯어먹는다는 이유였다. 소년 박선석은 참새 다리를 학교에 내고 공책을 받았다. 참새가 줄어들자 오히려 해충이 늘었다. 정부는 참새를 ‘4해’에서 제외했다. 소년 박선석이 교사에게 따졌다. “아니, 그 사이에 참새가 공산당에 투항했습니까? 몇년 동안 해롭다가 왜 갑자기 이로와졌습니까?” 박선석은 호된 꾸지람을 들었고, 친구들은 그에게서 멀어졌다. “참 말도 안되는 세상이었다”고 박씨는 웃으며 말했다.

고중(고등학교) 학력인 그는 정식으로 문학 수업을 들은 적이 없다. 평생 본업은 농사였는데, “그저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쓴다”고 말했다. 개혁·개방 이후에야 그의 글이 세상의 빛을 받았다. 1981년, 37살의 늦은 나이로 등단했다. <털없는 개> <쓴웃음> 등을 펴내며, 대약진·문화혁명·개혁개방의 격류에 휘말린 조선족의 고통을 해학적 문체로 풀어냈다. 문학을 좋아하는 조선족 사이에서 그의 이름은 높지만, 조선족 출판 시장이 협소하여 원고료 수입은 많지 않아 보였다. 여느 시골집과 다름없는 그의 텃밭에는 마늘과 감자가 자라고 있다.

헤어질 때, 그는 꼬깃꼬깃 접은 지폐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한상 가득 술·안주를 대접하고도 모자라, 굳이 차비를 주겠다며 소매를 끌었다. “손님의 일생을 살았다”는 그의 돈을 한국에서 온 손님은 차마 받을 수 없었다.

 


△ 정문철 (56살) 

정문철씨
정문철씨
한족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 1994년 한국에 가서 일했다. 1998년 한국에서 돌아온 뒤, 조선족 마을을 지키겠다는 그의 신념이 더 강해졌다. 이후 길림성 유하현 영풍촌 마을 서기 일을 맡고 있다. 영풍촌은 경상도 출신 ‘남도치’들이 모여 살던 동네다. 정씨 선대의 고향도 경상북도 상주다. 북한 출신 조선족을 ‘북도치’, 남한 출신 조선족을 ‘남도치’라 부르는데, 초기에 이주한 북도치는 국경 지대 근처에 자리잡았고, 나중에 건너온 남도치는 북도치의 거주지를 지나 더 북쪽으로 올라갔다.

지난 7월, 유하 조선족 소학교의 졸업식에서 학교 운영위원인 정씨는 다공능교실(소강당) 연단에 올라 강화(축사)를 했다. “13년째 졸업식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강당이 꽉 찼어요. 오늘은 빈자리가 많군요. 사회·문화의 발전은 사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우리 민족이 더 발전합니다.” 졸업식에서 32명이 졸업장을 받았지만, 그들의 부모조차 모두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교사를 제외한 어른은 10여명이었다. “예전엔 소학교·중학교 졸업식이 조선족의 거대한 마을 잔치였다”고 정씨는 회고했다. 이젠 마을 잔치를 치를 마을 주민이 유하에 없다.

유하조선족 소학교의 전교생은 236명이다. 이 가운데 100여명이 기숙사에서 지낸다. 부모가 한국 등으로 떠나 돌봐줄 어른이 마땅치 않은 아이들이다. 부설 유치원에는 102명의 원생이 있다. 그 가운데 10여명은 기숙사에서 지낸다. 역시 부모가 없어 교사들이 함께 숙식하며 돌본다.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에 이를 때까지 유하현 조선족 아이들은 부모없이 지내는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정씨는 조선족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붕괴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토로했다. “생활수준은 조금 높아졌지만, 제 손발로 먹을 것 만들어 입에 넣을 수 있는 생존의 근거는 더 나빠졌어요.” 주어진 땅을 버리고 도시의 일용 비정규직 노동을 전전하는 조선족의 전망을 그는 비관했다. “대약진운동이나 문혁 때는 조선족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기라도 했지. 지금은 민족 전체가 사라지는 위기가 왔어요.” 그는 “비통하고 애통하다”고 거듭 말했다. 유하조선족 소학교 아이들은 원더걸스의 ‘노바디’를 부르고 춤추며 졸업식 기념 공연을 했다.

△ 이광철 (가명·38살)
이광철씨
이광철씨
 

한국에서 10년 동안 일했다. “1994년 9월에 가서 2004년 5월에 왔다”고 그는 구체적으로 말했다. 조선족 고중(고등학교)을 중퇴하고 흑룡강성의 어느 유전 지대에서 일하던 그는 “정부가 노무 수출을 한다기에” 응모하여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한국에 갔다. “공부하는 건 싫었고, 마침 한국 바람도 불고 있어서 일찍부터 출국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10대 시절부터 그의 꿈은 한국에 가는 것이었다. 80년대 초반, 삼촌이 숙모와 함께 한국에서 약을 팔아 1년 동안 20만위안(약 360만원)을 벌었다. 일찍이 상상해본 적 없는 큰 돈이었다. 이후 온 식구가 한국 꿈을 꾸었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 매형, 매제가 모두 한국에 건너가 지금껏 머물고 있다. 어머니는 입주 가정부고, 누나·매형은 울산의 어느 공장에서 일하며, 아버지와 매제는 건설현장에서 인테리어 일을 한다. 여동생만 남편과 떨어져 중국 장춘에 산다.

한국 입국 직후 이씨는 플라스틱 주형을 떠서 생수통과 간장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는데,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첫 월급을 10만원도 채 안줘서” 도망쳐 나왔다. 산업연수생 비자가 끝난 뒤에도 눌러 앉아 불법체류자가 됐다. 전국을 다니며 여러 직업을 전전했는데, 어느 동네의 슈퍼 아줌마가 이씨를 간첩으로 오해하여 경찰에 신고한 일도 있었다. 경찰은 이씨가 간첩이 아닌 것만 확인하고 돌아갔다. 불법체류 여부는 확인하지 않았다.

이씨의 기억에 따르면, 한국 정부의 불법체류자 단속은 종잡을 수 없다. 신문배달원 시절, 헬멧을 쓰지 않고 오토바이를 몰았다고 경찰에 붙잡혔는데, 역시 그냥 풀려났다. “불법체류자가 있으니 잡아가라”는 신고를 받아야 한국 관리들은 움직였다. 채무 관계가 얽힌 조선족이 상대를 신고하여 강체출국 당하는 일도 있다고 김씨는 말했다.

한국에서 마지막 직업은 전국의 건설현장에 다니며 싱크대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조선족 아내를 한국에서 맞선으로 만나 결혼했다. “한국에서 결혼하는 조선족이 많다”고 그는 말했다. 결혼적령기의 조선족 남녀가 한국으로 떠나오면서, 조선족은 평생의 베필을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정한다. 한국에서 이씨는 정식 결혼은 못하고 동거만 했다. 불법체류자 단속에 붙잡혀온 2004년에야 중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김씨는 올 봄, 한국행 여행비자를 신청했다. 불법체류 기록이 말소되어 비자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궁리하고 있다. 택시를 운전하는 동안 그는 한국 가요를 듣는다. 그의 휴대폰 벨소리조차 주현미의 노래다.

△ 김영옥 (59살)
중국 길림 유하현 영풍촌 신발툰에서 조선족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김영옥 전도사
중국 길림 유하현 영풍촌 신발툰에서 조선족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김영옥 전도사
 

1976년 길림성 유하현 영풍촌에 시집 왔다. 시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북도 경주다. 문화혁명 때, 시아버지는 “한국이 좋다”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한국 가서 세상 뜨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으나, 결국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시아버지가 못가본 한국에 남편과 두 딸이 건너가서 일한다. 아들은 베이징에 있다.

마을에 있는 조선족 교회에 나와 할머니들과 대화하는 게 그의 소일거리다. 조선족의 한국 방문이 시작된 1988년 무렵, 한국 교회들은 중국 동북 조선족 마을에 발빠르게 건너가 선교 활동을 했다. “옛날엔 120명씩 나왔는데, 요즘은 많이 나오면 30명이야.” 김씨가 말했다. 교회에는 목사가 없고, 할머니들끼리 전도사와 집사와 권사가 되어 성경을 읽는다.

조선족 마을에서 할머니들은 교회로, 할아버지들은 노인협회로 나가 하루를 보낸다. 경로사상이 드높았던 조선족 마을마다 노인협회가 있는데, 지금은 명목만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마을 노인협회 회장을 한족이 맡고 있다”고 김씨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김씨는 혼자 사는 집 마당에 가지를 내놓아 말리고 있었다. 한국에 나간 남편과 딸에게 줄 음식이다. “남아 사는 사람은 쓸쓸하지. 마을에 할머니들만 남았는데, 그 중에 내가 제일 젊어요.” 그는 마을에 불어닥친 한국 바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너도 나도 똑같이 (농사 지으며) 살면 되는데, 한국 다녀온 사람은 뭘 자꾸 더 쓰거든. 그러니 비교가 되어서 너나 없이 한국 가는 거지.” 가난하지만 마을에서 어울려 다 함께 사는 일의 가치를 김씨는 그리워하고 있었다.

현재 영풍촌 인구의 90%는 한족이다. 몇 남은 조선족은 모두 노인이다. 노인이 세상을 뜨면, 한국에 나가 있던 가족들이 돌아와 시내 화장터로 몰려 간다. “요즘엔 한족들이 상여 매고 장사 치르더라고.” 그런 날이면 마을이 시끌벅적하다. 꽃상여 태워 마지막 길 배웅해줄 조선족 젊은이가 영풍촌에는 없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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