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8월 당시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있던 김정남 선생의 자택을 김수환 추기경이 방문했다. 86년 ‘5·3 인천 사태’로 수배중인 이부영 민통련 사무처장의 도피를 도와준 혐의로 수배됐던 그가 이듬해 ‘6·29 선언’으로 수배가 풀려 집으로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왼쪽부터 함세웅 신부, 김정남 선생, 김 추기경, 김 선생의 넷째딸 은민양, 신홍범 전 <한겨레> 논설주간, 고영구 변호사, 재일 민주화운동가 송영순씨.
김정남은 누구
사실 김정남 선생은 ‘민주화운동 30년’을 또다시 되짚어보기로 마음먹기까지 상당기간 ‘숙고’와 ‘인내’가 필요했다. 2008년 5월 <한겨레> 창간 20돌을 맞아 집필을 의뢰했을 때 “때가 되면 얘기하겠다”고 했던 그는 3년 남짓 만에 약속을 지켰다.
그는 2005년 펴낸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진실, 광장에 서다>(창비)의 후기에서도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보완할 생각’이라고 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꼬박 5년간 몰두한 역작이었지만 “미흡하고 엉성한 대목이 많다”고 고백했던 그는 이번 연재를 통해 그때는 말하지 않았거나 말할 수 없었던 비화들을 밝힐 작정이다.
“김정남은 70~80년대 대부분의 주요 민주화운동 사건을 막후에서 조직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때 표면적으로는 명망가들이 전면에서 활동했지만, 배후에서 그분들을 하나로 엮어내고 무수한 성명서나 선언문들을 쓴 게 바로 그입니다.”
지난 5월 구술회고록 <인권변론 한 시대>를 펴낸 홍성우 변호사가 그를 ‘민주화운동의 막후 비밀병기’라고 부른 이유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 삶 자체가 민주화운동사’라고 했다. 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때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발탁돼 난생처음 공직에 올랐을 때까지 그의 이름은 ‘얼굴 없는 운동가’였다. 그 말마따나 그는 민주화운동 30년여 동안 무수히 벌어진 시국사건 관련 기록이나 자료에서 우연히 찍힌 사진 한 장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여전히 스스로 ‘민주화 유공자’로 나설 생각은 없다고 했다. “반대급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고, 부끄러워서….” 대신 그는 사무실 한편에 걸려 있는 한자 휘호 ‘신독헌’(愼獨軒·혼자 있을 때도 스스로 삼가고 경계하라)을 바라봤다. “민주화는 한 시점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늘 지키고 가꿔가야 할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으로도 읽혔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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