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3일, 나는 마침내 보았다. 한반도를 떠도는 전쟁의 망령을, 그 실체를. 오랫동안 뿌연 안갯속에 가려져 있던 위험의 실체를.
오늘 출근해 신문들을 모조리 훑어보았다. 현장 상황과 북한의 공격 배경, 단호한 대응을 촉구하는 목소리, 금융시장 충격, 외국의 반응 등 으레 볼 수 있는 기사들로 도배가 돼 있다. 과거 북한의 ‘서울 불바다’ 위협 등 남북의 긴장이 급격히 고조됐을 때 늘 연출됐던 사재기도 이번에는 드물다. 섬사람들은 육지로 대피하기 바빴지만, 육지 사람들은 그다지 긴장을 느끼지 않는다. 주식시장도 곧바로 진정되고 있다. 별 게 아니니까?
21세기 한반도 남쪽에서 사는 우리가 진정으로 궁금해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문들이 수많은 지면을 할애해 쏟아놓은 글들에선 찾을 수 없다. 그 물음은, 아무런 죄가 없는 내 동생같은 해병대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마른 하늘의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희생을 당해야 하는 이 사태의 실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니까. 나는, 우리는 그런 위험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며느리도 알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상당 기간 한반도와 국제 문제에 천착했던 필자는 북한 해안포의 연평도 공격을 통해 한반도 안보 위기의 실체를 충격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한국전쟁 이후 남북 사이에 발생한 그 어떤 위기보다도 소름끼치는 것이다. 우리 국민의 대다수가 북한 공격용 무기의 사정권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더는 박제화된 글자가 아님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북 긴장이 일정 수위, 또는 임계점을 넘어가면 비슷한, 아니 훨씬 큰 규모의 국지적 무력충돌과 그에 따른 피해의 우려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그 피해자는 필자일 수도, 당신일 수도 있다.
한반도 전쟁 유령이 모호했던 것은 우리의 안보 불감증 때문도 아니요, 전쟁 억지력이 충분히 갖춰져 있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실감할 수 있는 증거물이 없어 투명하게 인식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는다. 한반도에 전면전 가능성은 없다고. 동의한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미국이 외과수술 방식의 평양 폭격을 계획했을 때처럼 전쟁 직전까지 치달은 적은 없지 않다. 그러나 전면전의 방아쇠는 누구도 당길 수 없다. 그 뒤를 감당할 수 있는 정치세력 또한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우려하면서도 전쟁 예방을 위한 필요충분한 조처를 해오지는 않았다. 전면전이 가능하지 않고, 나 자신이 그 피해자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니까. 이번 북한의 해안포 공격으로 남북 대립의 진정한 위험은 전면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반도를 지배하는 진짜 공포는 바로 제한적, 국지적 전투다. 이번 사태는 남북 사이의 제한적 전투 가운데 B급 정도에 해당한다. 서해 교전과 같이 양쪽 전투병력만 관련된 무력충돌을 C급이라고 볼 때,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이번 사태는 한 단계 더 일상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위험이다. 그럼 A급은? 휴전선 일대에 배치된 1만문 정도의 북한의 대포들이 수도권을 겨냥해 불을 뿜는 상황이다. 북한은 수도권 전체를 사정권 안에 두고 있는 장사정포 300문 정도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장사정포를 쏘면 전면전으로 비화하는가, 또 북한은 전면전을 우려해 그처럼 강도 높은 공격은 삼갈 것인가. 이번 사태를 통해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이 명확해졌다. 이번에 연평도의 해병부대를 타격 목표로 삼았던 북한 포부대가 언제 남쪽의 심장부를 겨냥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왜? 그런 사태가 생기더라도 전면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지극히 낮기 때문에. 전면전은 남쪽에서 남쪽이 몇배로 응징할 태세가, 그럴 방법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유약하게 비칠까봐 뒤늦게 내놓은 말처럼. 우리가 가장 높은 강도의 보복이라고 설정한 북 미사일 기지 대응폭격을 한다고 해보자. 전면전으로 치달을까? 대답은 ‘노’다. 물론 양쪽의 무력충돌이 어느 정도 더 고조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면전으로 가기 위해선 양쪽이 다 어떤 희생에도 아랑곳않고 반격, 재반격을 주고받아야 한다. 가능할 것으로 보는가. 전면전이 발발하면 속전속결로 끝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쪽 지도부가 ’올인’을 할테니. 1950년대 한국전쟁 때도 3년 이상을 끌었다. 짧은 시간 안에 북쪽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지리한 장기전이 되기 십상이다. 21세기에 남쪽 국민들이, 바로 당신이, 가족과 친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 널부러지는 상황을 허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한다면 왜? 무엇을 얻기 위해? 북한을 이기기 위해? 북한을 이기면 박살난 내 삶이 돌아오는가.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할 사람은 거의 없다. 다시 말해 무력충돌이 아무리 고조되더라도 남쪽은 언제나 전투 중단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도 마찬가지다. 이라크나 아프간을 마음먹고 작살된 미국 또한 전쟁을 부추기는 쪽으로 움직일 수가 없다. 나와 당신들의 하나뿐인 목숨이 걸려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남과 북이 처한 상황은 180도 다른 것이다. 국지전으로 끝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남북이 입은 피해를 비교해본다고 하자. 전체적으로 보면, 비슷할 수도 있고, 북쪽이 더 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가 이긴 것인가. 여기에 맹점이 있다. 우리가 정말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북이 ‘비대칭적 위험’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비대칭적 위협이나 비대칭적 전쟁 등의 얘기는 익숙할 것이다. 정규군이 아닌 테러집단의 위협이나 그런 세력과 전투를 벌일 때 이런 표현을 쓴다. 비대칭적 위험이란 양쪽이 안고 있는 위험의 수준에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을 말한다. 바둑으로 따지면, 꽃놀이패에 해당한다. 패싸움에서 질 경우 한쪽은 돌 하나 잃는 데 그치지만, 상대방은 대마가 죽어 바둑에서 지는 그런 패를 말한다. 돌 하나밖에 피해가 예상되지 않는 쪽은 수많은 선택지를 갖게 된다. 돌 하나 이상의 이득을 얻을 수 있으면 어떤 수도 가능하기에. 반면, 반대쪽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된다. 패를 잘못 쓰면 바로 지기 때문에. 좀더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수식으로 나타내보자. 실제 위험의 정도를 D라고 하고, 그 위험이 현실화할 가능성을 P, 위험에 따른 피해의 규모를 S라고 하면, D=c*P*S 라는 식이 성립한다. 여기서 c는 위험계수다. 위험이 현실화할 가능성과 그 규모의 곱이 실제 느끼는 위험의 정도가 된다. 위험 현실화 가능성은 남북이 마찬가지다. 그런데 피해의 규모는 절대적으로 다르다. 남쪽을 보자. 우리 사회는 병사 한 명, 시민 한 명이라도 남북의 무력충돌로 희생되면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다. 개개인의 생명만큼 소중한 가치가 없다. 군인도 마찬가지다. 이번 사태 희생자들처럼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거나, 먹고 살기 위해 군대를 직장으로 삼은 사람일 뿐 그 생명이 다른 이들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 권위주의 체제인 북은 어떨까. 남쪽의 반격으로 우리의 몇 배가 되는 기지가 파괴되고, 북한 사람들 몇백, 몇천명이 죽었다고 하자. 김정일을 정점으로 하는 북한 지도부가 받을 타격이 얼마나 될까. 남쪽이 받는 정치 사회 경제적 타격과 비한다면 어느 정도가 될까. 거의 없거나 미미한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전면전으로 비화할 단계까지 간다고 해보자. 북한 지도부의 생각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전면전은 곧 북한의 패배, 권력의 상실과 죽음을 뜻하기에. 그때 그들이 방향을 선회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라크전처럼 평양을 점령해 김정일과 김정은을 체포할 수 있을까. 그 전에 전투중단을 요청해올텐데. 다시 말해, 북한의 선택지는 가벼운 도발부터 국지적 전투, 전면전 전 단계까지 폭넓다. 반면, 남쪽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돼 있다. 어떤 것도 국민의 희생보다 높은 가치를 가질 수 없다. 남쪽 최고 군통수권자가 아무리 단호한, 또는 막대한 응징을 외치더라도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비대칭적 위험이라는 한반도 대치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봤을 때 우리에게 최선의 선택지가 무엇인가. 군사적 대응은 무의미하다. 북한은 김정일 일가가 피해를 입지 않는 한 타격을 입었다고 받아들이지 않을테니. 비대칭적 위험 상황에서 가장 무서운 게 바로 국지적 전투다. 양쪽이 충돌하더라도 북은 별 부담이 없고, 남쪽은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북쪽이 유혹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남쪽의 호전세력들이 흔히 쓰는 강경한 무력 보복이 얼마나 무모한 얘기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남쪽이 몇배, 아니 몇십배로 보복하더라도 그것은 북한 지도부가 아니라 주민들의 피해를 늘리는 데 그친다. 우리가 쓸 수 없는 카드인 것이다. 그런 무모함이 수도권을 향해 포신을 정렬하고 있는 북한 장사정포의 불을 당기게 한다면 남쪽은 아수라장으로 바뀐다. 비굴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얘기다. 미국이 걸핏하면 무력공격도 옵션에서 제외하지 않았다고 떠들어대지만, 나와 가족의 삶이 붕괴되는 위험을 눈앞에 두고 공격 어쩌구 할 사람은 없다. 미국 사람들이 이라크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가난으로 월급을 군에 자원할 수밖에 없었던 저소득 계층 외에 실질적인 피해를 입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무력충돌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곳이 아니다. 무력이 아니라면 다른 대응수단이라도 있어야 한다. 안보리 결의 할 만큼 했고, 경제 제재도 가동되고 있는데 뭐가 남아 있을까. 우리는 이번 사태를 통해 남북 관계 방정식을 다시 쓸 필요가 있다. 대북 지원은 퍼주기가 아니다. 단지 미래의 혼란이나 통일 비용을 줄이기 위한 투자만도 아니다. 그것은 위험 관리 비용이자, 평화 유지 비용이다. 경협도 마찬가지다. 북한 또한 잃을 것이 분명하게 보일 때 딴짓을 하지 않는 것이다. 쥐를 막다른 데로 몰면 고양이를 문다. 북한을 벼랑으로 몰면 지도부는 타격을 입지 않는 국지적 전투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대북 지원은 북한이 그런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당근이며, 지렛대다. 북한이 금강산 관광 재개에 목을 매고 있는 것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얻을 게 있기에 안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과 함께 대부분의 당근과 지렛대를 스스로 버렸다. 그리고는 북한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왔다. 북한이 국지적 단발적 공격을 하는 데는 대단한 구실이 필요한 게 아니다. 남북 사이에 이번 정도의 빌미는 널려 있다. 이번 사태는 결코 일과성이 아니다. 평시에 남쪽 영토에 포사격을 한 이상, 그 표적은 점점 더 많은 민간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옮겨갈 것이다. 북한을 방치하는 한 우리는 언제 날아오는 포탄의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 전면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내가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잊어야 할 때가 됐다. 이것이 한반도를 떠도는 유령의 실체다. 박중언 기자 parkje@hani.co.kr
한반도 전쟁 유령이 모호했던 것은 우리의 안보 불감증 때문도 아니요, 전쟁 억지력이 충분히 갖춰져 있기 때문도 아니다. 단지, 우리가 실감할 수 있는 증거물이 없어 투명하게 인식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많은 사람들은 믿는다. 한반도에 전면전 가능성은 없다고. 동의한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미국이 외과수술 방식의 평양 폭격을 계획했을 때처럼 전쟁 직전까지 치달은 적은 없지 않다. 그러나 전면전의 방아쇠는 누구도 당길 수 없다. 그 뒤를 감당할 수 있는 정치세력 또한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우려하면서도 전쟁 예방을 위한 필요충분한 조처를 해오지는 않았다. 전면전이 가능하지 않고, 나 자신이 그 피해자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니까. 이번 북한의 해안포 공격으로 남북 대립의 진정한 위험은 전면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반도를 지배하는 진짜 공포는 바로 제한적, 국지적 전투다. 이번 사태는 남북 사이의 제한적 전투 가운데 B급 정도에 해당한다. 서해 교전과 같이 양쪽 전투병력만 관련된 무력충돌을 C급이라고 볼 때,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이번 사태는 한 단계 더 일상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위험이다. 그럼 A급은? 휴전선 일대에 배치된 1만문 정도의 북한의 대포들이 수도권을 겨냥해 불을 뿜는 상황이다. 북한은 수도권 전체를 사정권 안에 두고 있는 장사정포 300문 정도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장사정포를 쏘면 전면전으로 비화하는가, 또 북한은 전면전을 우려해 그처럼 강도 높은 공격은 삼갈 것인가. 이번 사태를 통해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이 명확해졌다. 이번에 연평도의 해병부대를 타격 목표로 삼았던 북한 포부대가 언제 남쪽의 심장부를 겨냥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왜? 그런 사태가 생기더라도 전면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지극히 낮기 때문에. 전면전은 남쪽에서 남쪽이 몇배로 응징할 태세가, 그럴 방법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유약하게 비칠까봐 뒤늦게 내놓은 말처럼. 우리가 가장 높은 강도의 보복이라고 설정한 북 미사일 기지 대응폭격을 한다고 해보자. 전면전으로 치달을까? 대답은 ‘노’다. 물론 양쪽의 무력충돌이 어느 정도 더 고조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면전으로 가기 위해선 양쪽이 다 어떤 희생에도 아랑곳않고 반격, 재반격을 주고받아야 한다. 가능할 것으로 보는가. 전면전이 발발하면 속전속결로 끝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쪽 지도부가 ’올인’을 할테니. 1950년대 한국전쟁 때도 3년 이상을 끌었다. 짧은 시간 안에 북쪽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지리한 장기전이 되기 십상이다. 21세기에 남쪽 국민들이, 바로 당신이, 가족과 친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 널부러지는 상황을 허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런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한다면 왜? 무엇을 얻기 위해? 북한을 이기기 위해? 북한을 이기면 박살난 내 삶이 돌아오는가.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할 사람은 거의 없다. 다시 말해 무력충돌이 아무리 고조되더라도 남쪽은 언제나 전투 중단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국제사회도 마찬가지다. 이라크나 아프간을 마음먹고 작살된 미국 또한 전쟁을 부추기는 쪽으로 움직일 수가 없다. 나와 당신들의 하나뿐인 목숨이 걸려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남과 북이 처한 상황은 180도 다른 것이다. 국지전으로 끝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남북이 입은 피해를 비교해본다고 하자. 전체적으로 보면, 비슷할 수도 있고, 북쪽이 더 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가 이긴 것인가. 여기에 맹점이 있다. 우리가 정말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북이 ‘비대칭적 위험’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비대칭적 위협이나 비대칭적 전쟁 등의 얘기는 익숙할 것이다. 정규군이 아닌 테러집단의 위협이나 그런 세력과 전투를 벌일 때 이런 표현을 쓴다. 비대칭적 위험이란 양쪽이 안고 있는 위험의 수준에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을 말한다. 바둑으로 따지면, 꽃놀이패에 해당한다. 패싸움에서 질 경우 한쪽은 돌 하나 잃는 데 그치지만, 상대방은 대마가 죽어 바둑에서 지는 그런 패를 말한다. 돌 하나밖에 피해가 예상되지 않는 쪽은 수많은 선택지를 갖게 된다. 돌 하나 이상의 이득을 얻을 수 있으면 어떤 수도 가능하기에. 반면, 반대쪽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된다. 패를 잘못 쓰면 바로 지기 때문에. 좀더 이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수식으로 나타내보자. 실제 위험의 정도를 D라고 하고, 그 위험이 현실화할 가능성을 P, 위험에 따른 피해의 규모를 S라고 하면, D=c*P*S 라는 식이 성립한다. 여기서 c는 위험계수다. 위험이 현실화할 가능성과 그 규모의 곱이 실제 느끼는 위험의 정도가 된다. 위험 현실화 가능성은 남북이 마찬가지다. 그런데 피해의 규모는 절대적으로 다르다. 남쪽을 보자. 우리 사회는 병사 한 명, 시민 한 명이라도 남북의 무력충돌로 희생되면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다. 개개인의 생명만큼 소중한 가치가 없다. 군인도 마찬가지다. 이번 사태 희생자들처럼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거나, 먹고 살기 위해 군대를 직장으로 삼은 사람일 뿐 그 생명이 다른 이들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 권위주의 체제인 북은 어떨까. 남쪽의 반격으로 우리의 몇 배가 되는 기지가 파괴되고, 북한 사람들 몇백, 몇천명이 죽었다고 하자. 김정일을 정점으로 하는 북한 지도부가 받을 타격이 얼마나 될까. 남쪽이 받는 정치 사회 경제적 타격과 비한다면 어느 정도가 될까. 거의 없거나 미미한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전면전으로 비화할 단계까지 간다고 해보자. 북한 지도부의 생각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전면전은 곧 북한의 패배, 권력의 상실과 죽음을 뜻하기에. 그때 그들이 방향을 선회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라크전처럼 평양을 점령해 김정일과 김정은을 체포할 수 있을까. 그 전에 전투중단을 요청해올텐데. 다시 말해, 북한의 선택지는 가벼운 도발부터 국지적 전투, 전면전 전 단계까지 폭넓다. 반면, 남쪽의 선택지는 극히 제한돼 있다. 어떤 것도 국민의 희생보다 높은 가치를 가질 수 없다. 남쪽 최고 군통수권자가 아무리 단호한, 또는 막대한 응징을 외치더라도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비대칭적 위험이라는 한반도 대치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봤을 때 우리에게 최선의 선택지가 무엇인가. 군사적 대응은 무의미하다. 북한은 김정일 일가가 피해를 입지 않는 한 타격을 입었다고 받아들이지 않을테니. 비대칭적 위험 상황에서 가장 무서운 게 바로 국지적 전투다. 양쪽이 충돌하더라도 북은 별 부담이 없고, 남쪽은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북쪽이 유혹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남쪽의 호전세력들이 흔히 쓰는 강경한 무력 보복이 얼마나 무모한 얘기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남쪽이 몇배, 아니 몇십배로 보복하더라도 그것은 북한 지도부가 아니라 주민들의 피해를 늘리는 데 그친다. 우리가 쓸 수 없는 카드인 것이다. 그런 무모함이 수도권을 향해 포신을 정렬하고 있는 북한 장사정포의 불을 당기게 한다면 남쪽은 아수라장으로 바뀐다. 비굴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얘기다. 미국이 걸핏하면 무력공격도 옵션에서 제외하지 않았다고 떠들어대지만, 나와 가족의 삶이 붕괴되는 위험을 눈앞에 두고 공격 어쩌구 할 사람은 없다. 미국 사람들이 이라크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가난으로 월급을 군에 자원할 수밖에 없었던 저소득 계층 외에 실질적인 피해를 입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무력충돌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곳이 아니다. 무력이 아니라면 다른 대응수단이라도 있어야 한다. 안보리 결의 할 만큼 했고, 경제 제재도 가동되고 있는데 뭐가 남아 있을까. 우리는 이번 사태를 통해 남북 관계 방정식을 다시 쓸 필요가 있다. 대북 지원은 퍼주기가 아니다. 단지 미래의 혼란이나 통일 비용을 줄이기 위한 투자만도 아니다. 그것은 위험 관리 비용이자, 평화 유지 비용이다. 경협도 마찬가지다. 북한 또한 잃을 것이 분명하게 보일 때 딴짓을 하지 않는 것이다. 쥐를 막다른 데로 몰면 고양이를 문다. 북한을 벼랑으로 몰면 지도부는 타격을 입지 않는 국지적 전투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대북 지원은 북한이 그런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당근이며, 지렛대다. 북한이 금강산 관광 재개에 목을 매고 있는 것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얻을 게 있기에 안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과 함께 대부분의 당근과 지렛대를 스스로 버렸다. 그리고는 북한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왔다. 북한이 국지적 단발적 공격을 하는 데는 대단한 구실이 필요한 게 아니다. 남북 사이에 이번 정도의 빌미는 널려 있다. 이번 사태는 결코 일과성이 아니다. 평시에 남쪽 영토에 포사격을 한 이상, 그 표적은 점점 더 많은 민간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옮겨갈 것이다. 북한을 방치하는 한 우리는 언제 날아오는 포탄의 피해자가 될지 모른다. 전면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내가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잊어야 할 때가 됐다. 이것이 한반도를 떠도는 유령의 실체다. 박중언 기자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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