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활동을 하다 의문사한 아들의 진실을 밝히려고 23년 동안 세상과 싸워 온 김을선(78)씨가 7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 추모관 앞에서 진행된 아들의 입관식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남양주/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78살 노모, 노동운동 하다 숨진 아들 ‘눈물의 장례식’
의문사 노동자 정경식씨 ‘23년만에 장례식’
시퍼런 칼을 들어 생선 배를 가른다. 창자를 끄집어내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면, 도마 너머에 아들이 서 있다. 대우중공업 작업복 차림에 목에는 회사 출입증도 걸었다. “경식아….” 김을선(78)씨가 칼을 내려놓고 휘청휘청 아들에게 다가간다. 아들은 뒤로 물러난다. 젖은 눈이다. “어무이, 내가 우짜다가 이리 됐소?” 희미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을 때쯤 아들 모습은 사라진다.
김씨가 지난 23년간 수없이 꿔온 꿈이다. 아들을 붙잡아보려고 허우적댈 때면 장애가 있는 남편이 기어가서 물을 떠왔다. 젊은 시절 정미소에서 일하다 쌀가마에 깔리는 사고를 당한 뒤 남편은 일어서질 못한다. 어두운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 새벽이 오면 함지를 이고 집을 나섰다. 경남 마산시 진동리의 집에서 함안군 읍내까지 가서 생선을 팔았다. 생선을 손질하다 꿈에서 본 아들 생각에 늘 눈가가 붉어졌다.
‘민주노조를 만들겠다’던 28살 아들이 실종돼 유골로 발견된 지 23년 만에, 어머니 김씨는 8일 아들의 장례를 치른다. 23년 전엔 아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몰랐던 어머니는, 그 긴 세월을 살아내며 이젠 “아들의 장례는 꼭 민주노동자장으로 치를 것”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뜻대로 지난 6일부터 3일간 ‘노동해방 열사 정경식 동지 전국민주노동자장’이 치러진다. 7일 낮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선 입관식이 열렸다. 이제야 아들의 유골이 수습돼 관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긴 울음을 토했다. “자식 죽인 범인이 지척인데도 아무것도 못하고 23년이야. 이제는 보내야지. 내가 죽기 전에 장례를 치러줘야지.”
아들은 1987년 6월8일 월요일에 사라졌다. 기숙사에 살며 공장에 다녔던 아들은 주말에만 집에 왔다. 2남1녀 중 둘째지만 정신질환이 있는 형을 대신해 맏이 노릇을 했다. 실종 전날에도 집에 왔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좋아하는 돼지불고기를 해주려고 평소보다 일찍 생선 노점을 접고 돌아왔다. 하지만 아들은 시장에 가서 어머니를 만난 뒤 기숙사에 돌아갈 요량으로 집을 나선 뒤였다. 엇갈림이 아쉬워 어머니는 신문에 둘둘 싸인 돼지고기를 한참 쳐다봤다.
며칠 뒤 회사 동료한테서 “경식이가 며칠째 나오지 않는다”는 전화를 받았다. 회사를 찾아갔다. 대우중공업 창원공장 앞에서 “내 아들을 내놓으라”고 울부짖었다. 대답이 없었다. 어머니는 대통령, 내무장관, 검찰총장, 창원경찰서장 등 가능한 모든 곳에 진정서와 탄원서를 넣었다.
민주화운동 인정…거리의 어머니 “내 죽기전에 묻어야지”
어머니는 거리로 나섰다. 87년 7월부터 들불처럼 일어난 노동자대투쟁 때 어머니는 아들의 사진을 들고 거리를 헤맸다. 노동자들이 모이는 곳마다 달려가 “아들을 찾아달라”고 호소했다. 서울의 낯선 거리에서 밤을 새우고 마산으로 돌아오면 온몸이 저렸다. 하지만 동네에서 “빨갱이짓 하다 몸져누웠다”고 소문이 날까봐 앓지도 못했다. 어김없이 함지를 지고 생선을 팔러 나갔다. 9개월 만인 1988년 3월2일, 아들을 찾았다. 대우중공업이 바라다보이는 경남 창원 불모산에 산불이 났는데 진화 작업 중에 산불감시원이 화염 속에서 유골을 발견했다. 밤나무 아래, 유골이 발견된 자리에는 아들의 회사 출입증과 소주병, 목을 맬 때 쓴 것으로 추정되는 끈 등이 있었다. 그해 8월, 검찰은 정씨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노동운동 아들 실종 9달만에
산불 현장서 주검으로 발견
어머니, 진실 밝히려 거리로 어머니는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아들의 죽음을 파헤칠수록, 아들이 살았던 삶과 가까워져 갔다. 아들은 84년 5월 대우중공업 창원2공장 특수생산부에 입사했다. 당시 대우중공업은 군에 장갑차를 납품하는 1급 방위산업체로, 보안사·경찰 정보과·안기부 요원이 노상 드나들었다. 85년 아들은 드릴을 교체하다 오른팔이 드릴로 말려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철심을 박아 간신히 불구를 면했다. 퇴원 뒤 아들의 눈빛이 달라져 갔다. 회사로 복귀했지만 회사에서는 “본인 부주의로 사고가 났다”며 손으로 기계를 깎는 작업장으로 옮기라고 했다. 오른손 손가락이 잘 쥐어지지 않았던 아들은 “회사를 위해 일하다 사고를 당했는데 이제 회사를 그만두라는 얘기”라며 분노했다.
그 뒤 아들은 부쩍 ‘민주노조’ 이야기를 많이 했다. 노조가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팔을 다쳐 속상해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며 아들을 다독였다. 아들은 이후 민주노조를 꿈꾸는 이들과 함께 노조 지부장 선거운동을 했다.
노조 지부장 선거는 ‘민주파’에 유리했지만, 대의원 투표 결과는 6 대 5로 회사 쪽을 대변하는 후보가 이겼다. 아들은 회사 쪽 후보에게 표를 던진 이들이 회사로부터 회유를 당했을 것이라 판단하고 이들을 찾아가 따졌다. 한 대의원과 몸싸움이 벌어졌고 아들은 폭행죄로 고소당했다.
실종 당일, 아들은 “합의를 위해 대의원을 만나러 간다”며 외출증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어머니는 회사와 대의원의 집으로 수차례 찾아가 절규했지만, 되레 회사는 어머니를 폭력행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88년 2월에 김석좌 신부를 위원장으로 하는 ‘대우중공업 정경식 실종사건 진상규명대책위원회’가 구성됐다. 야당인 평민당도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창원공장을 방문했다. 하지만 진전은 없었다. 89년 7월부터 3개월간 마산교도소에 수감된 어머니는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석방된 이후 어머니는 라면상자에 넣어놓은 아들의 유골을 보며 식음을 전폐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의 전태일 어머니, 박종철 아버지가 “이러다 사람 잡는다”며 유골을 가져다가 마석 모란공원 납골당에 임시로 보관했다.
의문사·진실위 “타살 흔적” 불구
진상규명 불능 결정 ‘아쉬움’
지난달에야 민주화운동 인정
97년, 평민당 시절 만난 적이 있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머니는 기쁨에 몸을 떨었다. “총재님, 이담에 대통령 되시면 꼭 우리 아들 진상 규명 해주이소”란 말에 “꼭 진상 규명 해드리겠다”는 답을 들은 터였다. 이제 곧 대통령이 진상을 규명해줄 거라고 믿었다. 그동안 냉담했던 대우중공업에서 사람을 보내왔다. 1억5천만원을 합의금으로 제시했다.
“자식을 팔아먹을 수 없다”며 어머니는 호통을 쳤다. 99년 의문사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된다는 소식을 듣고 422일 동안 서울에서 지지 농성을 했다. 삭발도 했다. 2000년, 드디어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했다. 하지만 2002년의 1기 의문사위원회도, 2004년 2기 의문사위원회도 ‘진상 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당시 위원회는 아들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시키는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확인했다. 또 주검 발견 현장에서 채취한 토양에서 동물성 단백질이 부패할 때 생성되는 아질산염·암모늄염이 검출되지 않은 점, 목을 맨 것으로 추정되는 끈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다른 곳에서 죽은 뒤에 옮겨졌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누가, 왜 죽인 것인지 진실은 규명되지 않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도 같은 결과를 내놓았다.
지난달 23일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는 ‘정경식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다’는 결정을 내놨다. 진상을 규명해 범인을 지목할 수는 없지만,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사망했다는 것을 인정한 결과다. 물증은 없지만 타살됐다는 정황이 참작됐다. 하지만 이마저도 ‘민주화 운동 기여도 80%’라는 단서가 붙었다. 어머니는 “이제 와서 80%니,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냐”며 울먹였다. 보상금은 기여도 비율만큼만 지급된다.
마석 모란공원 납골당의 꼭대기층인 4층에 올라가자 나무 상자 하나가 덩그러니 있다. 상자를 열자 오른팔에 철심이 박힌 아들의 유골이 나왔다. “이제 우리 아들 언제 보노….” 어머니가 울었다. 아들은 8일 어머니와 함께 고향인 마산 진동으로 돌아갔다가, 경남 양산 솥발산 열사묘역에 묻힐 예정이다.
남양주/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어머니는 거리로 나섰다. 87년 7월부터 들불처럼 일어난 노동자대투쟁 때 어머니는 아들의 사진을 들고 거리를 헤맸다. 노동자들이 모이는 곳마다 달려가 “아들을 찾아달라”고 호소했다. 서울의 낯선 거리에서 밤을 새우고 마산으로 돌아오면 온몸이 저렸다. 하지만 동네에서 “빨갱이짓 하다 몸져누웠다”고 소문이 날까봐 앓지도 못했다. 어김없이 함지를 지고 생선을 팔러 나갔다. 9개월 만인 1988년 3월2일, 아들을 찾았다. 대우중공업이 바라다보이는 경남 창원 불모산에 산불이 났는데 진화 작업 중에 산불감시원이 화염 속에서 유골을 발견했다. 밤나무 아래, 유골이 발견된 자리에는 아들의 회사 출입증과 소주병, 목을 맬 때 쓴 것으로 추정되는 끈 등이 있었다. 그해 8월, 검찰은 정씨가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노동운동 아들 실종 9달만에
산불 현장서 주검으로 발견
어머니, 진실 밝히려 거리로 어머니는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아들의 죽음을 파헤칠수록, 아들이 살았던 삶과 가까워져 갔다. 아들은 84년 5월 대우중공업 창원2공장 특수생산부에 입사했다. 당시 대우중공업은 군에 장갑차를 납품하는 1급 방위산업체로, 보안사·경찰 정보과·안기부 요원이 노상 드나들었다. 85년 아들은 드릴을 교체하다 오른팔이 드릴로 말려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철심을 박아 간신히 불구를 면했다. 퇴원 뒤 아들의 눈빛이 달라져 갔다. 회사로 복귀했지만 회사에서는 “본인 부주의로 사고가 났다”며 손으로 기계를 깎는 작업장으로 옮기라고 했다. 오른손 손가락이 잘 쥐어지지 않았던 아들은 “회사를 위해 일하다 사고를 당했는데 이제 회사를 그만두라는 얘기”라며 분노했다.
고 정경식씨의 영정을 든 사촌동생 정경열씨와 설훈 전 의원(오른쪽 둘째) 등이 7일 오후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 추모관 앞에서 정씨의 입관식을 마친 뒤 운구를 하고 있다. 어머니 김을선(맨 왼쪽)씨가 흐느끼며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남양주/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진상규명 불능 결정 ‘아쉬움’
지난달에야 민주화운동 인정
정경식 사건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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