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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계엄상황서 1700명 성금 모은 원풍노조 부지부장

등록 2010-05-23 22:15

‘5월 광주 성금 모금’ 등으로 공안당국의 표적이 된 원풍모방 노조 부지부장 박순희씨가 수감돼 있던 1982년 10월1일 추석날 새벽, 수백명의 경찰이 사내 농성중인 조합원들을 강제해산시키고 있다. 원풍 노조는 그해 11월12일 결국 해체됐다.
‘5월 광주 성금 모금’ 등으로 공안당국의 표적이 된 원풍모방 노조 부지부장 박순희씨가 수감돼 있던 1982년 10월1일 추석날 새벽, 수백명의 경찰이 사내 농성중인 조합원들을 강제해산시키고 있다. 원풍 노조는 그해 11월12일 결국 해체됐다.
“의로운 항쟁” 조합원에 알려
470만원 윤대주교 통해 전달
옥살이 뒤 노동운동 ‘한길’로




[5·18 30돌-5월을 지켜온 여성들]<br> (16) 박순희

박순희(63·천주교 세례명 아그네스). ‘5·18’ 당시 그는 서울 영등포 대림동에 있던 원풍모방의 노동조합(원풍노조) 부지부장이었다. 1970년대부터 80년대 초반까지 강력한 단결력으로 전설적인 투쟁을 벌였던 원풍노조에는 호남지역 출신 여성 조합원들이 많았다. 80년 5월 광주항쟁이 터지자 광주가 고향인 조합원들은 가족들로부터 ‘시내의 아스팔트가 피범벅이 돼 계엄군들이 소방호스로 그 피를 닦아내고 있으며 시민들은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헌혈을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광주지역이 봉쇄된 뒤에는 매일같이 조합 사무실에 모여 가족들의 안부를 걱정했다.

그런데 당시 ‘광주시민들이 경상도 출신 계엄군을 집단으로 폭행했다’는 악의적인 보도가 쏟아져나오면서 원풍노조 안에서도 두 지역 조합원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노조는 이런 내부 갈등을 막고자 20일 동안 2300여명의 조합원들에게 ‘5·18은 전두환 신군부에 맞선 의로운 투쟁’이라는 내용의 역사교육을 했다. 이런 가운데 광주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일신방직, 기아자동차, 로케트전자 등의 노조원들이 다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노조는 회의를 거쳐 회사 식당에 모금함을 설치했고 1700여명의 조합원들이 5월 말까지 470만원의 ‘거금’을 모금했다. 민간 차원에서 모금한 사실상 최초의 ‘5·18’ 성금이었지만, 계엄령 치하에서는 참으로 ‘무모한’ 행동이었다.


박순희씨
박순희씨
구속된 지부장을 대신한 권한대행으로 그는 6월 초 비밀리에 광주로 내려가 가톨릭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에게 모금한 성금을 전달했다. 이 성금은 당시 광주 가톨릭노동청년회(JOC)에서 활동했던 정향자(59)씨에 의해 5·18 피해자들의 생계비와 수배자들의 도피자금, 유족 위로금 등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그때 그는 성금을 전하며 윤 주교에게 기부금 영수증을 부탁했다. “엉뚱하다”며 한바탕 웃으며 윤 주교가 써준 그 영수증이 훗날 그를 살렸다. 공안당국은 당시 모은 성금을 원풍노조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연관된 증거로 삼으려 했으나, 그 영수증을 제시해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해 7월 그는 방용석(전 노동부 장관) 당시 원풍노조 지부장과 함께 해고됐다. 8월부터 수배자로 쫓기던 그는 결국 81년 4월 안기부(현 국정원)에 잡혀가 고초를 겪었다. “그때 안기부에서 노동운동을 접으면 보건사회부 5급 공무원으로 보내주겠다고 회유”했지만 그는 이력서만 쓰고 버텨 결국 2년 남짓 옥살이를 했다.

그러는 사이 원풍노조는 전두환 정권의 이른바 ‘노동계 정화조치’로 82년 9월 해체됐다. 그해 10월1일 추석날 새벽, 회사의 ‘폐업 위협’과 정권의 노조 강제해체에 맞서던 노동자들은 사복경찰 수백명에게 쫓겨 회사 앞 6차선 도로를 맨발로 내달려야 했다. 이후 핵심 간부 11명은 전원 체포돼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83년 8월 풀려난 그는 노동운동의 불모지를 찾아다니며 활동했다. 주로 전주, 군산, 익산 지역의 성당에 ‘노동자의 집’을 만들어 노동자들을 도왔다. 이를 토대로 한 가톨릭노동사목 조직은 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를 만드는 데 핵심이 됐다. 그는 97년부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로 활동하다 지난 3월 후배에게 물려줬다.


스무살 푸른 청춘에 방직공장에 취직해 평생 노동운동을 하느라 어느새 환갑이 넘었지만, 그는 아직까지 혼자다. 요즘도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며 명동성당에서 단식중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돕고 있는 그는 “20대 청춘 때 나라에서 내 등에 칼을 꽂으려고 달려들었는데 남자 만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나는 남자 대신 노동운동과 혼인한 사람”이라며 웃었다. 어릴 때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70년대 초 전태일 열사의 삶을 따르기가 두려워 잠시 수녀원으로 들어갈 생각도 했다. 그러다 곧 수녀원마저 너무 사치스럽다는 깨달음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옳은 일을 하다가 예수님처럼 박해를 받고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벌써 예수님보다 곱절이나 많은 나이가 됐군요.”

‘부끄러운 17살 공순이’에서 ‘노동운동의 대모’가 된 박순희. ‘5·18’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이명박 정권이 4대강 사업 등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것을 보면 그 모든 투쟁과 민주화 역사가 물거품이 된 것 같다”는 그는 “그래도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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