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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세상…그게 전태일 정신”

등록 2009-12-31 20:24수정 2010-01-05 19:31

“사람이 사람대접 받는 세상…그게 전태일 정신”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전태일 분신 40년]
방현석이 만난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40년이 지났다. <내일을 여는 집> 등 1980년대 대표적인 노동소설을 쓴 방현석 중앙대 교수(문예창작)가 지난 25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81)씨와 누이동생 전순옥(56)씨를 만나 전태일의 기억과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이야기했다.

동대문 전철역 1번 출구를 나서면 창신동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이 있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오후, 나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이소선 어머니를 찾아갔다. 좁은 골목 안에 있던 옛집에는 ‘전태일 기념사업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지 않았다. 전순옥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사를 했다며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여든이 넘은 어머니에게 계단까지 오르내려야 하는 집은 아무래도 무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편리한 거처로 옮겼을 것이란 내 짐작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 5분도 되지 않아 도착한 전순옥씨가 나를 안내한 곳은 바로 옆 골목에 있는 전세 6000만원의 옹색한 셋집이었다. 그것도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2층.

“사무실을 옮기면서 기념사업회에서 얻어 준 거야. 아주 따뜻하고 편해. 사무실과도 가깝고.”

어머니가 창신동을 떠나지 못하는 진짜 이유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아들 전태일의 목숨과 바꾼 청계피복노조의 터전이었던 청계천을 어머니는 결코 떠날 수 없다.

● 40년 전
아들이 불탄 자리서 어머니는 일어섰다. ‘뼈가 가루 되어도 못다한 네뜻 잇겠다’던 마지막 약속처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40년 전 청계천에서 전태일이 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아들의 온몸은 흰 붕대로 감겨 있었다. 간절한 눈빛으로 어머니를 부른 전태일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누구의 얘기도 듣지 말고 내 말만 들어요. 내가 죽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캄캄한 세상에 빛이 스며들 조그만 구멍 하나가 생길 거예요. 노동자와 학생들이 힘을 합쳐 그 구멍을 넓힐 수 있도록 해줘요. 내가 다 못한 일을 엄마가 해준다고 내게 약속해 주세요.”

대답을 않는 어머니에게 전태일은 마지막 사력을 다해 약속을 요구했다. 어머니는 ‘내 뼈가 가루가 되어도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게 마지막이었지.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내 눈을 가리고 안가로 끌고 갔어. 그 사무실의 책임자가 잠실 34평 아파트 문서와 외환은행 통장, 새 보자기로 싼 현금 뭉치를 내놓고 자기들의 뜻에 따르라며 이미 친척들이 다 도장을 찍은 서류를 내밀었어. 난 그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어. 그런데도 영안실까지 돈 보따리를 들고 다시 찾아왔어.”

옆에 앉아 있던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씨가 그때를 회상했다.

“어머니가 우리 형제들을 불러 놓고 물었어요. 저 탁자 위에 있는 보따리 안에 든 것이 다 돈이다. 받는 것이 좋겠니 받지 않는 것이 좋겠니, 하고요. 그래서 제가 되물었어요. 받으면 어떻게 되냐고. 어머니는, 이걸 받으면 우리 형제가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 그러나 오빠가 하려던 일을 할 수는 없다고 하셨어요.”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다시 묻는 어린 딸에게 이소선은 대답했다.

“우리는 계속 힘들게 살아야 한다. 너희들도 공장에서 일해야 한다. 그러나 오빠가 하려던 일을 할 수는 있다.”

태삼, 순옥, 순덕, 어린 세 형제는 받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탁자 위에 놓인 보따리를 풀어 그 안에 든 돈뭉치를 꺼내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우린 이 돈 필요 없다! 돈 좋아하는 놈들 이 돈 다 가져가라.”

그때 전순옥의 나이 열여섯 살이었다.

● 오늘까지…
외롭고 억울한 노동자 곁엔 언제나 달려갔다. 쌍룡차로 기륭전자로…어깨 다독이고 힘을 보탰다.

“그땐 어머니가 왜 어린 우리에게 그런 걸 물었는지 몰랐어요.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들이 자기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그것에 책임지도록 가르쳤어요.”

이소선이 7000만원을 내던지고 받아낸 것이 청계피복노동조합 등록필증이었다. 1970년에 7000만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리고 40년, 어머니와 세 형제는 전태일이 가려던 그 길을 따라 살아왔다.

어머니와 세 형제가 지나온 발자국 하나하나에는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이 서려 있다. 최근에 어머니를 가장 가슴 아프게 만든 사람들은 기륭전자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었다. 장기 단식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노동자들이 단식을 중단할 때까지 어머니는 기륭전자에 열한 번을 찾아갔다.

“죽으면 당사자야 괜찮겠지만 그 부모들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 죽지 말아야지.”

기륭전자 노동자들을 껴안고 울며 단식을 멈추도록 설득해낸 것도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몸을 움직여서 젊은이를 하나라도 살릴 수만 있다면 죽는 날까지 꿈적거려야지.”

어머니의 투쟁은 증오가 아닌 생명을 향한 사랑이었다. 전태일을 한없이 여리고 따뜻한 인간으로 키운 이가 이소선이었다.

“쌍문동 판자촌에는 부모들이 모두 일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어. 저녁에 부모들을 기다리며 골목길에 나와 있는 아이들을 태일이는 우리 집에 데리고 와 놀아주었어. 마치 탁아소 같았어. 늦게 돌아온 동네 사람들은 으레 우리 집으로 아이를 데리러 왔지.”

비록 가난했지만 전태일의 가족은 어떤 집안보다 따뜻하고 화목했다. 전순옥은 어린 동생들에게 베풀었던 오빠의 사랑을 잊지 못한다.

“우리 형제는 서울의 유적지에 가보지 않은 곳이 거의 없어요. 오빠는 쉬는 날이면 막내 순덕이를 업고 우리와 함께 창경원도 가고 왕릉에도 갔어요. 여름이면 뚝섬유원지에 데리고 가서 놀아줬어요. 오빠는 읽은 책에 나오는 얘기, 밖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어머니는 물론이고 어린 우리들에게도 다 해줬어요. 그래서 우리도 자연스럽게 무슨 일이든 다 얘기했어요. 우린 다른 가족들도 다 그런 줄 알았어요. 그게 참 독특하단 걸 나중에 알았죠.”

따뜻한 사람 옆에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참 많은 고마운 사람들이 옆에서 도와줬지. 나한텐 다 고마운 사람들뿐이야.”

고마워, 보고 싶어, 사랑해. 인터뷰 도중에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어머니가 빠뜨리지 않고 말한다. 그 고마운 사람들에 2009년 세상을 떠난 두 대통령도 포함되는지 물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상수 변호사는 대우조선의 이석규가 죽었을 때 닷새 동안 함께 싸웠지. 경찰이 덮치기 직전에 같이 있던 두 변호사에게 있는 돈 다 내놓으라고 했지. 너희들은 변호사니까 굶진 않을 거 아니냐. 우리 노동자들은 밥값도 없다, 그랬지. 두 사람은 지갑을 털어주고 경찰과 협상하러 간다면서 내게 카메라와 서류를 잘 지켜달라고 했지. 변호사니까 안 잡아가겠지 했던 거지. 그런데, 웬걸. 바로 잡아가더라고. 별 수 있어? 종덕이, 우리 청계식구들 데리고 냅다 도망갔지.”

소설가 방현석(왼쪽)씨가 지난 25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오른쪽)씨와 서울 종로구 창신동 집에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삶과 죽음, 그 이후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가운데는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씨.  강재훈 선임기자 <A href="mailto:khan@hani.co.kr">khan@hani.co.kr</A>
소설가 방현석(왼쪽)씨가 지난 25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오른쪽)씨와 서울 종로구 창신동 집에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삶과 죽음, 그 이후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가운데는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씨.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대통령 된 다음 어머니를 청와대에 초대한 노 대통령은 대뜸, 그때 얘기부터 꺼냈다.

“어머니 그때 말이에요, 제 카메라하고 서류 다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셨잖아요, 그럴 수가 있어요, 하더라고. 그래 내가 뭐라나. 대통령 되신 분이 점잖지 못하게 뭐 그런 말씀을 하세요, 했지. 그랬더니 아 그렇지요 제가 대통령이지요? 그러면서 웃더라고. 참 착한 분이었어.”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은 전태일이 산화한 다음 이희호 여사가 쌍문동 집을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야당 시절에도 우리(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가 찾아가면 사업비를 도와주시던 분이었어.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법을 만들라고 422일 동안 천막농성을 해도 들어주지 않고 있을 때 청와대에 들어가서 김 대통령 만났어. 옆에 앉은 대통령 의자 바짝 끌어당겨 놓고 억울하게 죽은 애들 명예회복도 시켜주지 못할 거면 뭐하려고 대통령이 된 거냐고 막 따졌지. 얼마나 했는지 옆에 있던 김옥두씨가, 어무이 45분 얘기했으요. 이제 그만 허요, 하더라고. 그래도 김 대통령은 어무이 어무이 진정하세요, 그말만 했지 내 말 막지 않았어. 3일만 참으면 법 만들어주겠다고 해서 물러나왔지. 그런 대통령 또 없어.”

이날의 일에 대해 이희호 여사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열사명예회복 보상법과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은 2000년 마지막 법안으로 12월28일 국회를 통과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들만이 할 수 있는 모성의 승리였다. 이소선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인 ‘전태일기념관’이 세워지기를 기원한다.’

창신동 셋집의 어머니 방에는 문익환, 김대중, 김수환, 세 사람의 사진이 한 액자에 담겨 있다. 험악한 시대를 통과하며 의지가 되었던 마음의 벗들이다. 문익환은 벌써 앞서 갔고, 지난해 남은 두 벗마저 떠났다.

무엇이 이소선을 노동자들에서부터 대통령까지 어머니라고 부르게 만들고, 추기경이 그 이름 앞에서 눈물짓게 만들었을까.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나도 몰라. 어쩌면 그런 운명으로 태어난 것인지도 몰라.”

이소선의 아버지는 일제의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을 일본으로 밀항시켜 살려주는 조건으로 20세 연상의 정씨 성을 가진 남자와 재혼했다. 정씨들의 틈바구니에서 이씨 성을 가진 이소선은 학교에 가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때, 내 평생 사람 차별은 않겠다고 결심했지.”

전태일의 형제는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전순옥은 기억한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딸이라고 차별한 적이 없었어요. 딸이니까 안 된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구요. 어릴 때부터 어떤 일을 결정할 땐 우리에게 의견을 물었어요. 그런 민주주의가 우리 집에서 너무 당연했어요.”

● 그리고 남은 생…
아들은 노동의 새벽을 열었고, 어머니는 그 새벽을 지킨다. 성한 곳 없는 몸을 슬퍼할 새도 없이….

슬픈 한 해가 가고 어느새 새해가 밝고 있다. 전태일을 떠나보낸 지 어느새 40년이다. 약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만 같은 세상에서 젊은 사람들이 뭘 배우고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어머니는 못내 걱정스럽다.

“젊음보다 더 완전한 재산은 세상에 없어. 가고 싶은 데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잖아. 젊은이들이 이 완전한 재산을 가장 불완전한 재산인 돈을 버는 데 모두 탕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이제 재산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아 가고 싶어도 누가 데려다 주지 않으면 가지 못해.”

전태일 40주기, 어머니가 꿈꾸는 세상은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고 대접하는 세상이다. 그것이 전태일의 정신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전태일의 이름이 바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 마음으로 살다, 그 마음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오늘 어머니는 전신이 쑤신다. 얼마 전에는 병원에 가서 발목에 찬 물을 뽑고 왔다.

“동일방직 때일 거야. 기독교회관에서 형사들이 내 두 다리를 잡고 질질 끌며 계단을 내려왔어. 등과 어깨가 계단에 쾅쾅 부딪쳤지. 난 죽지 않으려고 머리만을 바짝 쳐들고 1층까지 끌려왔어. 골병들지 않은 데가 없어.”

밤 11시가 넘어 얘기가 끝났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려는 어머니를 만류하며 집을 옮겨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집도 고마워. 나 죽으면 이 집의 보증금도 재단으로 돌아갈 거야.”

어머니는 얼마 전 기념사업회가 있던 옛집과 동대문 상가에 있던 사무실을 처분하여 전태일 재단이 쓸 새집을 마련했다. 옛집은 1970년대 독일의 단체 ‘인간의 대지’가 지원한 돈으로 장만했던 것이고, 동대문 상가의 사무실은 미국 기독교 단체가 청계피복노조 사무실로 쓰라며 도와줘 장만했던 것이었다.

계단 아래에서 현관에 서 계신 어머니를 돌아다 봤다. 150㎝의 거인이 겨울밤 진눈깨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그가 누구라 해도 저 거인이 지나온 40년의 발자취 그 어느 하나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방현석/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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