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분신 40년]
방현석이 만난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방현석이 만난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40년이 지났다. <내일을 여는 집> 등 1980년대 대표적인 노동소설을 쓴 방현석 중앙대 교수(문예창작)가 지난 25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81)씨와 누이동생 전순옥(56)씨를 만나 전태일의 기억과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해 이야기했다. 동대문 전철역 1번 출구를 나서면 창신동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이 있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오후, 나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이소선 어머니를 찾아갔다. 좁은 골목 안에 있던 옛집에는 ‘전태일 기념사업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지 않았다. 전순옥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사를 했다며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여든이 넘은 어머니에게 계단까지 오르내려야 하는 집은 아무래도 무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편리한 거처로 옮겼을 것이란 내 짐작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 5분도 되지 않아 도착한 전순옥씨가 나를 안내한 곳은 바로 옆 골목에 있는 전세 6000만원의 옹색한 셋집이었다. 그것도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2층. “사무실을 옮기면서 기념사업회에서 얻어 준 거야. 아주 따뜻하고 편해. 사무실과도 가깝고.” 어머니가 창신동을 떠나지 못하는 진짜 이유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아들 전태일의 목숨과 바꾼 청계피복노조의 터전이었던 청계천을 어머니는 결코 떠날 수 없다. ● 40년 전
아들이 불탄 자리서 어머니는 일어섰다. ‘뼈가 가루 되어도 못다한 네뜻 잇겠다’던 마지막 약속처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외롭고 억울한 노동자 곁엔 언제나 달려갔다. 쌍룡차로 기륭전자로…어깨 다독이고 힘을 보탰다. “그땐 어머니가 왜 어린 우리에게 그런 걸 물었는지 몰랐어요.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들이 자기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그것에 책임지도록 가르쳤어요.” 이소선이 7000만원을 내던지고 받아낸 것이 청계피복노동조합 등록필증이었다. 1970년에 7000만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리고 40년, 어머니와 세 형제는 전태일이 가려던 그 길을 따라 살아왔다. 어머니와 세 형제가 지나온 발자국 하나하나에는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이 서려 있다. 최근에 어머니를 가장 가슴 아프게 만든 사람들은 기륭전자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었다. 장기 단식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노동자들이 단식을 중단할 때까지 어머니는 기륭전자에 열한 번을 찾아갔다. “죽으면 당사자야 괜찮겠지만 그 부모들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 죽지 말아야지.” 기륭전자 노동자들을 껴안고 울며 단식을 멈추도록 설득해낸 것도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몸을 움직여서 젊은이를 하나라도 살릴 수만 있다면 죽는 날까지 꿈적거려야지.” 어머니의 투쟁은 증오가 아닌 생명을 향한 사랑이었다. 전태일을 한없이 여리고 따뜻한 인간으로 키운 이가 이소선이었다. “쌍문동 판자촌에는 부모들이 모두 일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어. 저녁에 부모들을 기다리며 골목길에 나와 있는 아이들을 태일이는 우리 집에 데리고 와 놀아주었어. 마치 탁아소 같았어. 늦게 돌아온 동네 사람들은 으레 우리 집으로 아이를 데리러 왔지.” 비록 가난했지만 전태일의 가족은 어떤 집안보다 따뜻하고 화목했다. 전순옥은 어린 동생들에게 베풀었던 오빠의 사랑을 잊지 못한다. “우리 형제는 서울의 유적지에 가보지 않은 곳이 거의 없어요. 오빠는 쉬는 날이면 막내 순덕이를 업고 우리와 함께 창경원도 가고 왕릉에도 갔어요. 여름이면 뚝섬유원지에 데리고 가서 놀아줬어요. 오빠는 읽은 책에 나오는 얘기, 밖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어머니는 물론이고 어린 우리들에게도 다 해줬어요. 그래서 우리도 자연스럽게 무슨 일이든 다 얘기했어요. 우린 다른 가족들도 다 그런 줄 알았어요. 그게 참 독특하단 걸 나중에 알았죠.” 따뜻한 사람 옆에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참 많은 고마운 사람들이 옆에서 도와줬지. 나한텐 다 고마운 사람들뿐이야.” 고마워, 보고 싶어, 사랑해. 인터뷰 도중에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어머니가 빠뜨리지 않고 말한다. 그 고마운 사람들에 2009년 세상을 떠난 두 대통령도 포함되는지 물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상수 변호사는 대우조선의 이석규가 죽었을 때 닷새 동안 함께 싸웠지. 경찰이 덮치기 직전에 같이 있던 두 변호사에게 있는 돈 다 내놓으라고 했지. 너희들은 변호사니까 굶진 않을 거 아니냐. 우리 노동자들은 밥값도 없다, 그랬지. 두 사람은 지갑을 털어주고 경찰과 협상하러 간다면서 내게 카메라와 서류를 잘 지켜달라고 했지. 변호사니까 안 잡아가겠지 했던 거지. 그런데, 웬걸. 바로 잡아가더라고. 별 수 있어? 종덕이, 우리 청계식구들 데리고 냅다 도망갔지.”
소설가 방현석(왼쪽)씨가 지난 25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오른쪽)씨와 서울 종로구 창신동 집에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삶과 죽음, 그 이후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가운데는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씨.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아들은 노동의 새벽을 열었고, 어머니는 그 새벽을 지킨다. 성한 곳 없는 몸을 슬퍼할 새도 없이…. 슬픈 한 해가 가고 어느새 새해가 밝고 있다. 전태일을 떠나보낸 지 어느새 40년이다. 약자는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만 같은 세상에서 젊은 사람들이 뭘 배우고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어머니는 못내 걱정스럽다. “젊음보다 더 완전한 재산은 세상에 없어. 가고 싶은 데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잖아. 젊은이들이 이 완전한 재산을 가장 불완전한 재산인 돈을 버는 데 모두 탕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이제 재산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아 가고 싶어도 누가 데려다 주지 않으면 가지 못해.” 전태일 40주기, 어머니가 꿈꾸는 세상은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고 대접하는 세상이다. 그것이 전태일의 정신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전태일의 이름이 바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 마음으로 살다, 그 마음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오늘 어머니는 전신이 쑤신다. 얼마 전에는 병원에 가서 발목에 찬 물을 뽑고 왔다. “동일방직 때일 거야. 기독교회관에서 형사들이 내 두 다리를 잡고 질질 끌며 계단을 내려왔어. 등과 어깨가 계단에 쾅쾅 부딪쳤지. 난 죽지 않으려고 머리만을 바짝 쳐들고 1층까지 끌려왔어. 골병들지 않은 데가 없어.” 밤 11시가 넘어 얘기가 끝났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려는 어머니를 만류하며 집을 옮겨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집도 고마워. 나 죽으면 이 집의 보증금도 재단으로 돌아갈 거야.” 어머니는 얼마 전 기념사업회가 있던 옛집과 동대문 상가에 있던 사무실을 처분하여 전태일 재단이 쓸 새집을 마련했다. 옛집은 1970년대 독일의 단체 ‘인간의 대지’가 지원한 돈으로 장만했던 것이고, 동대문 상가의 사무실은 미국 기독교 단체가 청계피복노조 사무실로 쓰라며 도와줘 장만했던 것이었다. 계단 아래에서 현관에 서 계신 어머니를 돌아다 봤다. 150㎝의 거인이 겨울밤 진눈깨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그가 누구라 해도 저 거인이 지나온 40년의 발자취 그 어느 하나도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방현석/소설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