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업체 노동자의 ‘감정노동’ 조사
부당한 고객에도 웃어야…감정노동 스트레스 심해
2명중 1명 우울증 등 겪어…월1회 휴가도 어려워
2명중 1명 우울증 등 겪어…월1회 휴가도 어려워
백화점에서 화장품 파는 일을 하는 강아무개(29·여)씨는 20일, 손님을 맞을 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19살에 시작해 백화점 경력이 벌써 10년차.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최근엔 옆 매장의 직원이 손님한테 뺨을 맞고 폭언을 듣는 것을 보면서 ‘모멸감’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 고객이 지나가면 웃으며 맞아야 한다. 그래야만 하는 게 규정이니까.”
업무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불면증으로 넉달째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강씨는 결국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는 “직원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고객들이 이해하려는 것을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연말연시, 백화점이나 할인점 등엔 쇼핑을 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이런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12월은 그리 ‘기쁜’ 시즌이 아니다. 백화점이 하루도 쉬지 않고 문을 열고, 고객이 늘어날수록 ‘감정노동’ 스트레스는 커지기 때문이다.
감정노동이란 판매직·콜센터 등 서비스산업 노동자들이 자신의 감정과 표현을 고객에게 맞추면서 일하는 것을 말한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장아무개(25·여)씨는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말고는 아무 내색 않고 일을 해야 하는 게 우리들”이라고 말했다.
서비스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강씨처럼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감정노동자들이 많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2007년 실시한 서비스산업 종사자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백화점 노동자 가운데 56.2%가 우울증 등 스트레스 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이은희 로레알코리아 노조위원장은 “문제는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이른바 ‘진상’ 고객만이 아니라 열악한 근무여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노동자들이 제대로 쉴 수 없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최근 백화점 업계가 대형 점포 증설과 함께 영업시간 연장에 나서면서 노동자들의 근무여건은 크게 후퇴한 상태다. 1990년대까지 있었던 ‘주 1회 휴점’은 없어졌고, ‘월 1회 휴점’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추석 등 명절 연휴에 이틀씩 쉬었던 것도 올해는 하루에 그쳤다. 백화점 판매노동자들은 일주일 평균 6일을 일한다.
한 백화점의 화장품 매장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김아무개(35·여)씨는 “회사에 감정노동 해소 프로그램 같은 게 없는 상태라 직원들이 같이 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게 유일한 방법인데, 영업시간이 연장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게다가 백화점에서 일하는 직원들 대부분이 백화점에 직접 고용되지 않은 협력업체 직원이다 보니 이들의 복지는 뒷전으로 밀린다. 김씨는 “직원 휴게실 자리에 고객 편의시설이 들어서고, 갑자기 30분씩 연장영업을 해도 협력업체 직원들은 문제를 제기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임상혁 노동환경연구소장은 “서비스산업이 발전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감정노동의 문제는 이미 심각해져 있다”며 “고객이나 관리자가 서비스 노동자를 인격체로 대우해줘야 하고, 휴식시간 보장이나 인원 확충 등 제도적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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