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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14좌 다 오른 뒤엔 무형의 봉우리 향할 것”

등록 2009-11-22 16:53수정 2009-11-23 12:00

등반중에 만난 등산객들과 기념 쵤영하는 오은선씨.
등반중에 만난 등산객들과 기념 쵤영하는 오은선씨.
재도전 벼르는 오은선 도봉산행 동반기
“어떤 봉우리도 다시 가고 싶진 않아
기진맥진 죽음 코 앞 순간 황홀감도”
햇빛이 비치지 않는 응달엔 밤에 내린 눈이 수줍게 쌓여 있다. 쌀쌀하게 느껴지는 날씨지만 마음은 마구 설렌다. 바로 앞에 사뿐사뿐 산길을 걸어가고 있는 여인 때문이다.

다부진 느낌의 단신이다. 단단하게 느껴지는 체구엔 영하의 찬바람도 비껴가는 듯 하다. 세계에서 가장 독한 여인으로 꼽힌다. 8000m 급 고봉을 무산소로 오르내리는 여성 등반가. 여성으로는 인류 최초로 14개의 8000m 급 고봉을 모두 등정하는 기록이 내년 봄을 기다리고 있다. 오은선(43) 대장(모두들 그를 대장이라고 부른다)과의 도봉산 등반은 정말 행운이었고 유쾌했다.

“눈은 언제 봐도 눈부시고 아름다워. 맥킨리는 황홀” 

오은선씨가 도봉산에 오르고 있다.
오은선씨가 도봉산에 오르고 있다.
지난달 14번째 안나푸르나봉 등정에 실패하고 귀국한 뒤, 집에서 요양 중이던 오 대장이 귀국 이후 처음으로 근교 산행에 나선 것은 최홍건 한국산악회장의 전화 때문이었다. 공직에 근무할 때부터 알던 언론인들과 정기적인 산행을 하던 최 회장은 21일의 도봉산 산행에 오 대장을 부른 것이다. 지난달 말 귀국 뒤 가능한 외부 행사를 피한 채 몸을 추스리던 오 대장은 부드러운 미소로 다가왔다.


이날 산행은 도봉산 입구에서 출발해 자운봉 입구의 포대 능선까지 갔다가 요기를 하고, 망월사로 내려오는 4시간 코스. 원정 후 처음 산행인 오 대장을 배려해 최 회장은 가능한 부담없고 짧은 코스를 선택했다.

앞서 가는 오 대장에게 지나치듯 말을 건냈다.

“눈이 지겹지 않으세요?”

살짝 등반로에 깔려 있는 눈을 밟았다.

“아뇨. 눈은 언제 보아도 눈부시고 아름다워요. 특히 맥킨리봉의 눈은 황홀했어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항상 배경이 되고 있는 차디 찬 눈에 대한 오 대장의 애정은 의외였다.

내친 김에 한마디 더 물었다.

“올라갔던 8000m 급 고봉 가운데 다시 가고 싶은 봉우리는?”

웃으면서 답한다.

어떤 봉우리도 다시 가고 싶지 않아요.”

헉. 그렇구나. 매번 얼마나 힘들었으면…….

오 대장은 조금 뜸을 들인 뒤 덧붙인다.

“그런데 K2 봉은 아주 인상적이예요. 너무 멋있는 산이죠. 수려하다고 할까요.”

도봉산행을 함께한 이들.뒷 줄 왼쪽 끝이 최홍건 한국산악회장, 그 옆이 오은선씨.
도봉산행을 함께한 이들.뒷 줄 왼쪽 끝이 최홍건 한국산악회장, 그 옆이 오은선씨.

“마지막 캠프 30m 앞두고 쓰러졌는데 순간 너무…” 

휴일을 맞아 등산객이 붐빈다. 전세계에서 한국처럼 등산을 좋아하는 민족이 있을까? 산 중턱 양지 바른 곳에서 수제 쿠키를 먹으며 휴식하는데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가 외친다. “어머, 그…그 유명한 오은선씨 아닌가요? 아이 반가워라.” 우연히 오 대장을 본 50대 아주머니는 반색하며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앞서 가던 그 어주머니의 남편과 친구들이 우루루 몰려 내려온다. 오 대장은 환하게 웃는다.

어쩌면 한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을 한 여인 중 하나로 역사는 그를 기록할지 모른다. 오 대장이 배낭을 메며 말한다.

“외국 사람들을 만나면 왜 한국 여인들이 다방면에서 뛰어날 수 있는지 물어봐요. 골프, 피겨 스케이트, 양궁 그리고 등반에서도 한국 여인들은 정말 잘하는 것 같아요.”

그리곤 묵묵히 발길을 옮긴다. 자연이 허락해야만 올라 갈 수 있다는 그 높은 봉우리에서의 한 발 한 발과 이처럼 인간들이 더덕더덕 붙어살고 있는 도심의 낮은 산에서의 한 발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문득 오 대장이 산을 무서워하는지 궁금해졌다.

“높은 산에 올라갈 때마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나요?”

“아뇨. 죽음이 무섭다고 느낀 적은 없어요. 다만 이러면 죽을 수 있겠구나 라고 느낀 적은 몇 번 있지요.”

“언제 제일 죽음과 가까이 갔었나요?”

“아마도 에베레스트 등정 때였을 거예요. 등정에 성공하고 천신만고 끝에 하산했지만 마지막 캠프를 약 30m를 앞두고 힘이 부쳐 쓰러졌어요. 순간 너무 편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마도 황홀했던 것 같아요. 높은 산에서 동사했던 산악인들의 표정이 대부분 행복한 표정이라는 것이 이해됐어요.”

수많은 죽음을 맞닥뜨렸던 오 대장이다. 동료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하고도 산행을 계속해 “독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오 대장이었다.

“산에 가면 제일 먹고 싶은 것은 순대와 곱창” 

닭백숙을 맛있게 먹는 오은선씨
닭백숙을 맛있게 먹는 오은선씨
2시간 정도 올라 도착한 포대능선 아래서 점심을 먹는다. 한 한국산악회 임원은 오 대장을 위해 밤새 토종닭 백숙을 마련해 왔다. 먹음직한 토종닭에 육쪽 마늘과 6년근 인삼을 썰어 넣고 푹 고아 보온병에 넣어 왔다. 또 다른 산행 멤버는 따끈한 정종에 맛있는 어묵국을 준비해 왔고, 찰진 주먹밥도 입 맛을 자극한다.

오 대장은 참 잘 먹는다. 내가 갖고 간 햇쌀로 빚은 막걸리도 한 잔 맛있게 들이킨다.

“전 뭐든 잘 먹어요. 가리는 것 없이 말이예요.”

순간 바보같은 질문을 했다.

“정상 부근에서 간절히 먹고 싶었던 음식은 뭐였죠?”

“뭐가 먹고 싶겠어요. 머리가 뽀개질 듯 아프고 숨이 턱턱 막히는데.”

겸연쩍은 마음에 “베이스 캠프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있지 않나요?”라고 말꼬리를 돌렸다.

“순대와 곱창 등이 제일 생각났어요. 한국을 떠나면 먹을 수 없잖아요.”

이제 하산길이다. 오 대장은 마치 미끄러지듯 가뿐하게 내려간다. 앞서가는 오 대장에게 다시 진지하게 물었다.

“그렇게 높은 산에 자주 가면 뇌세포가 파괴돼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면서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기억력이 바닥이예요. 전화번호도 2~3개밖에 기억 못해요. 그런데 좋은 점이 있어요. 기분 나쁘고 불행했던 기억을 빨리 잊는다는 것이죠. 복잡하면 산행 못해요. 단순하게 살아요. 아주 단순하게.”

“남자 철인 3종경기 선수같은 심폐 기능” 

오은선
오은선
멀리서 차소리가 들린다.

뭐가 오 대장이 세계 최고의 여성 등반인이 되도록 했는지가 궁금해졌다.

“언제부터 산에 올랐나요?”

초등학교 시절 집 근처의 인수봉을 오르는 어른들을 보며 나도 크면 산에 오르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런 꿈은 대학에 진학해서 이뤄졌어요. 대학에서 전산학을 전공했는데, 산악부에 들어간거죠. 그런데 암벽 타는 것은 무서웠어요. 그래서 선배들은 다 암벽을 타고 올라가면 혼자 짐을 지켰어요. 그러다보니 오기가 생기더군요. 암벽을 배우고 타기 시작했는데, 너무 너무 재미있었어요. 세상에서 제일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었어요.”

“신체에 어떤 장점이 있나요?”

“최근 체육과학연구소에서 신체 기능을 점검했는데, 남자 철인 3종경기 선수같은 심폐기능을 갖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등산을 좋아 하셨던 부모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 같아요.”

“항상 죽음과 직면하는데, 종교는 있나요?”

“아뇨. 특별한 종교는 없어요. 다만 산에 절이 있기 때문에 가끔 절에 가서 백팔배도 해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정말 중요해요.”

“내년 봄 8000m급 14좌를 모두 오르는 기록을 세운 뒤엔 어떤 목표가 있을까요?”

“아마도 또다른 높은 봉우리를 향해 갈 것 같아요. 그 봉우리는 아마도 무형의 봉우리겠지요.”

뭐든 잘 먹었다, 닭다리도 세개씩이나 

154cm의 오은선씨는 필자의 키를 맞추기 위해 돌에 올라섰다. 그리곤 정겹게 어깨동무를 했다. 오른쪽 사진은 오은선씨의 사인.
154cm의 오은선씨는 필자의 키를 맞추기 위해 돌에 올라섰다. 그리곤 정겹게 어깨동무를 했다. 오른쪽 사진은 오은선씨의 사인.
뒷풀이는 망월사역 근처의 호프집이었다. 맛있는 닭튀김과 맥주, 막걸리로 아쉬움을 달랬다. 오 대장은 닭 다리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 3개씩이나.

한 동료가 건배를 제의한다.

“제가 `은선아‘ 라고 외치면 여러분은 ’사랑해’라고 외치십시오.“

“고맙습니다.” 수줍게 오 대장은 웃는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난다. 배낭을 메고 호프집을 나와 길을 나서는 오 대장을 배웅한다. 문득 오 대장이 `작은 거인‘으로 느껴진다. 히말라야 설원을 고독하게 누비는 `작은 거인‘. 그렇게 오 대장은 자동차가 붐비는 큰 길로 사라졌다.

도봉산에 해가 기운다. 뒤를 잇는 노을이 눈부시다.

글 사진/이길우 <한겨레> 사업국장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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