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의 미디어법에 대한 야당 의원들의 권한쟁의 심판에서 권한을 침해했지만, 법은 유효하다는 판결이 내려진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재판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재판관들이 입장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언론법’ ‘야간집회 금지’ 등 법리 아닌 정치적 판단
재판관 선임방식·6명 정족수·합의제 외면도 원인
재판관 선임방식·6명 정족수·합의제 외면도 원인
서울 재동에 있는 헌법재판소 건물 꼭대기층에는 창문만한 크기의 무궁화 9개가 돋을새김돼 있다. 헌법의 가치를 지키는 9명의 헌법재판관을 상징하는 조각이다. 헌재에도 소장이 있긴 하지만, ‘왕무궁화’는 없다. 헌재 쪽은 “각 재판관은 (모든 결정에서) ‘9분의 1’만큼 지분을 갖는다. 정치적 판단은 있을 수 없고 재판관 각자의 판단만 있다”고 늘 강조한다.
헌재는 그러나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건일수록 애매모호한 판단을 내려왔다. 지난 29일 “처리 절차는 위법하다”면서도 법안의 효력은 그대로 살려놓은 신문·방송법 관련 결정이 대표적 사례다. 얼핏보면 야당엔 명분, 여당엔 실리를 선물한 듯하다. 헌재는 최근 야간 옥외집회 금지 조항에도 위헌성은 인정하되 내년 6월말까지 ‘연명’을 보장하는 헌법불합치를 선고해, 900여개 관련 사건 재판부에 혼란을 안겨줬다. 두 사건 모두 정치적 갈등의 최전선에서 비롯됐다.
헌재 안팎에서는 이런 결정이 되풀이되는 이유를 ‘정치적 사건에 대한 정치적 판단’에서 찾는다. 이번 선고를 앞두고도 헌재가 어느 한쪽에 완승을 안겨주지 않으려고 ‘제3의 길’을 찾는다는 말이 돌았다. 임지봉 서강대 교수(헌법학)는 “헌법적·정치적 분쟁이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 이를 법적 관점으로 해결하는 게 헌재의 존립 이유다. (그런데도) 헌재가 정치적 판단을 한다면 존재 이유를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것”이라고 짚었다.
‘정치적 안배’를 하는 재판관 선임 방식도 도마에 오른 지 오래다. 헌재 재판관은 대통령과 국회, 대법원장이 각기 3자리씩 지분을 갖고 번갈아 지명·추천한다. 재판관들은 낙점해준 쪽에 심정적으로 가깝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여·야 모두 ‘명문대를 나온 고위직 판·검사 출신’을 선호하는 탓에 보수성을 띨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50~60대 재판관 9명이 ‘단심’으로 결정하는 헌재는, 다양한 연령대의 법관들이 심급별로 3차례나 심리하는 법원보다 ‘고인 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결정 정족수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 법조계 인사는 “위헌 결정 정족수를 재판관 3분의 2인 6명으로 정한 것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 정족수를 채우려다 보니 성격이 다른 의견을 억지로 붙여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며 “야간 옥외집회 금지 조항도 5명이 ‘단순 위헌’ 의견을 냈지만, 헌법불합치를 주장한 2명의 재판관 때문에 결론은 헌법불합치로 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미국의 연방대법원 등은 위헌 여부를 다수결(과반수)로 정한다.
정치적 배경이 다른 재판관들이 ‘백가쟁명’을 벌이며 합의제의 취지를 퇴색시킨다는 비판도 있다. 신문법의 무효 여부를 두고 재판관 9명이 무려 6개의 의견을 냈다. 토론을 통해 합의를 모색하기보다 자기 의견만 내세우다 적당한 선에서 봉합한 셈이다. ‘전원재판부’라는 명칭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이런 경향은 지금의 제4기 재판부에서 특히 심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한 재판관은 “처음에는 다른 재판관들에게 내 의견을 입이 아프도록 설명했다. 하지만 이제 딱 한마디만 해봐도 서로에게 손톱 하나 들어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지 않는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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