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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고무신·구두·운동화…100년 세월이 한데 어우러졌다

등록 2009-08-24 06:54

소설가 손홍규씨가 23일 오후 국회 앞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조문하는 시민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소설가 손홍규씨가 23일 오후 국회 앞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조문하는 시민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눈부시게 푸르른 날은
떠나보내기엔
적당한 날이 아니다




소설가 손홍규 ‘작별 고하던 날’

날이 궂었다면 나았을까
맑은 하늘 그것마저 서러워라

눈이 부셨다. 하늘은 방금 세수하고 나온 아이처럼 해맑았다. 국회의사당이 바라다 보이는 임시분향소 위로 하염없이 햇살이 쏟아졌고 가로수마다 확성기라도 매달린 듯 저무는 여름을 맹렬하게 살아내는 매미들의 울음이 요란했다.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손바닥만한 그늘이라도 좋았다. 늦여름의 기세가 이리도 등등할 줄이야. 날이 궂었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아무 일 없다는 듯, 외려 여름날의 절정이 바로 오늘이라는 듯, 티 없이 맑은 하늘이어서 그것마저 서러웠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누군가를 떠나보내기엔 적당한 날이 아니다.

하늘을 떠받친 국회의사당의 부드러운 옥빛 돔마저 오늘은 하나의 기원처럼 여겨졌다. 사람들의 시선은 옥빛 돔을 더듬다가 먼 하늘로 옮겨갔다. 끝을 알 수 없으므로 오래도록 바라볼 수는 없었다. 점심 무렵이 되자 분향소 앞의 줄이 길어졌다.


사람들은 분향을 하고 서명을 한 뒤 저마다 손에 그이의 일기가 실린 인쇄물을 쥐고 그늘을 찾아갔다. 겨우 한 뼘 높이의 턱이어도 좋고 그냥 맨바닥이어도 좋고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생을 더듬듯 그이의 일기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찬찬히 읽었다. 누군가는 안경을 닦고 누군가는 옆 사람의 어깨를 꼭 쥐어주고 누군가는 소리 죽여 웃기도 했다. 햇살은 더 강렬해졌고 더러운 건물 속의 죄악이 발효하기 좋은 시각이 되었다. 배고픈 이들은 동행과 김밥을 나눠먹고 온 식구가 둘러앉아 도시락을 까먹기도 했다. 그들 사이를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연락선처럼 누비고 다녔다. 함께 있어도 외로웠고, 홀로 있어도 외로울 것을 알기에 그 자리를 떠나지는 못했다. 그렇게 우리가 생의 한 면을 공유했던 사람을 떠나보낼 준비를 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슴이 헛헛한 이유는
투정부릴 누군가를
영영 잃고 말았기 때문

정해진 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눈에 띄게 불었다. 국회의사당 정문 맞은 편 도로를 따라 서강대교 방향으로 길게 경찰의 통제선이 늘어섰고 그와 평행을 이루며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분향소 좌우의 대형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영결식이 시작된 것이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규정내릴 수 있는 낱말은 없었다. 플랫슈즈에서 하이힐까지, 고무신에서 샌들까지, 운동화에서 구두까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조선 시대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 마냥 한복을 차려입고 상투 튼 머리에 망건까지 얹은 어르신도 보였다. 그러니까 이곳엔 백년이 모인 것이다. 우리의 과거부터 우리의 현재, 그리고 우리의 미래인 저 순진무구한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백 년의 세월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다.

대형 텔레비전을 통해 영결식 장면이 비쳐졌다. 사람들은 마치 초대권이 무슨 소용이냐는 듯, 바로 이곳이 영결식장이기라도 한 듯, 일어서라면 일어섰고 묵념하라면 고개를 숙였고 앉으라면 앉았으며 애국가가 흐르면 가슴에 손바닥을 댔다.

영결식이 진행되는 내내 매미는 울었다. 저기에 자신의 온 생을 탈탈 털어 민주와 통일에 일시불로 스스로를 지불해버린 이가 누워 있었다. 일어나라고 다시 한 번만 일어나라고 매미는 울었다. 약력소개와 조사, 추도사, 종교의식이 끝나고 그이가 지불했던 생의 편린들이 영상으로 나오자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신의 말씀을 빙자하면서 죄책감도 없이 세계와 인간을 파괴하는 자들에 맞서 평생을 싸운 그이의 생전 모습이었다.

우리는 단수가 아닌 복수
최선을 다해 그에게 화답했다

예포소리가 나자 앉았던 사람들도 모두 일어섰다. 운구행렬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움직였고 나도 그 물결을 따라 걸어갔다. 인도에서 그이를 기다리는 시간은 적막하고 쓸쓸했다. 내 옆의 중년 여인은 주문을 외듯, 안 오시네, 안 오시네, 중얼거렸다. 조금 뒤 운구행렬이 도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햇살은 너무 강렬했고 그래서 오열하기엔 멋쩍었다. 슬픔을 표현하는 데 서투른 사람들답게 허둥대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살짝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운구행렬이 눈앞을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용서를 구하듯, 편히 가세요, 라고 속삭였다. 귓가를 간질이는 저 나직한 고백들. 고백의 사태들 속에서 나는 오한을 느꼈다. 이토록 무더운 날 한기를 느끼는 이유가 무언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해 겨울, 15대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그날 나는 정처 없이 도시를 떠돌았고 밤이 이슥해서야 단골 술집을 찾았다. 투표는 잘 했냐는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나는 선거권이 없었다. 집행유예로 출소한 지 겨우 한 달. 나에게는 처음이었을 대통령 선거였건만 나는 투표를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나는 아마도 좀 서글프게 웃었을 것이다. 그리고 밤새 어둡고 더럽고 좁은 술집에서 텔레비전을 지켜보았다. 다음 해 군대에 갔고 그곳에서 사면소식을 들었다. 불침번을 서고 화장실에 들어가 소리 죽여 울었다. 그렇게 하나씩 만들어가는 거라고 다짐을 하면서.

그러나 오늘 나는 또 다시 구경꾼이 되어 그이를 보냈다. 가슴이 헛헛한 이유는 그이에게 못되게 군 게 아파서가 아니라, 투정부리듯 못되게 굴 누군가를 영영 잃고 말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슬픔은 이기적이다.

선두차량이 서강대교 입구에 다다르자 이별이란 그런 식이어야 한다는 듯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운구행렬이 멀어졌다. 운구차와 나란히 걷던 사람들이 뛰었다. 나도 달렸다. 그리고 우리는 서강대교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고 행렬이 사라진 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기어이 가셨구나. 누군가 이렇게 중얼거렸고 누군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그이를 떠나보내는 우리는 단수가 아닌 복수였다. 그러니 또한 그이를 마중 나오는 이들 역시 복수일 것이다. 그들 중에는 석 달 먼저 우리가 떠나보냈던 이도 있을 것만 같다. 카뮈는 말했다. 우리 사회에 새로운 것을 가져오려면 개인적인 행동이 아니라 집단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오늘 최선을 다해 그이에게 화답했다. 눈이 부신데도.

손홍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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