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나리히코 일본 주오대 명예교수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내가 처음 김대중씨를 만나뵌 것은 1983년 미국 워싱턴 교외의 아파트였다. 김대중씨는 1980년 가을 군사재판에서 1, 2심 모두 사형판결을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당해 사형이 확정됐다. 이후 전두환 정권과 미 레이건 정권의 정치적 협상으로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다시 같은 해 3월 전두환씨의 대통령 취임에 따른 사면으로 20년으로 감형됐다. 1982년 12월23일 병 치료를 이유로 미국으로 보내진 뒤 워싱턴 교외의 아파트에서 살게 된 것이다. 납치사건 규명운동중 워싱턴 찾아가 병문안 나는 1973년 8월 잡지 <세계>에서 김대중씨의 인터뷰 기사 ‘한국민주화에의 길’을 읽고 김대중씨가 뛰어난 민주주의자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그 직후 김대중씨가 한국의 비밀기관원에 의해 납치된 것에 충격을 받고 김씨의 원상회복과 납치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981년 1월 김대중씨를 병문안 하기 위해 워싱턴 교외로 김씨를 방문한 것이다. 1973년 8월 납치사건 이후 10년에 걸쳐 군사 독재정권에 줄곧 탄압을 받아온 김대중씨는 찾아온 우리들에게 “일본의 여러분들이 여러가지로 신경을 써 준 점에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한 뒤 “광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고 많은 정치범이 투옥된 상황에서 나 혼자 위로와 병문안의 말을 듣는 것은 정말로 마음 괴롭다.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있는 것은 많은 이름없는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고 설령 감옥에 돌아가게 된다고 해도 지금은 하루빨리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씀했다. 나는 몸시 감명을 받았다. 김대중씨는 또 당시 만남에서 “납치사건 관계를 모두 용서하고 그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전두환 장군의 쿠데타가 없었다면 납치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완전히 해결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납치사건은 김대중만의 문제가 아니다. 저런 사건이 유야무야 되는 것을 허용하면 제3세계 정치인의 인권은 지켜질 수 없다. 제3세계 정치인의 한명으로서 제3세계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도 납치사건을 철저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도 말했다. 우리들이 일본에 돌아오자 일본 정부는 “납치사건은 10년이 지났기 때문에 1983년 8월8일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앞으로는 미국 연방수사국 방식으로 수사를 계속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분명히 수사의 ‘막내리기’를 의미한 것이었다.
우리들은 이에 초당파 국회의원, 대학 교수, 목사, 언론인 등 45명으로 1984년 1월23일 ‘김대중납치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결성해 본격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개시했다. 나는 1984년 7월 다시 미국을 방문해 우선 피해자 김대중씨로부터 납치의 체험을 자세하게 듣고 동시에 많은 자료를 모아 1987년 ‘전보고 김대중 사건’을 출판했다. 지난해 마지막 만남…‘선민주’ 깊은 뜻 배워 1987년 8월 나는 자택연금이 해제된 김대중씨의 초청으로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그때 ‘전보고 김대중 사건’의 한국어판이 준비돼 내가 서문을 써 출판됐다. 그러자 납치사건 최고책임자로 보이는 이후락씨가 “김대중의 생명을 구한 것은 자신이다”라고 자처했다.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은 살해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대중씨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고 말했다. 명언이다. 내가 김대중씨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지난해 12월 노벨평화상 수상 8주년 기념의 국제심포지엄에 초청된 때였다. 김대중씨는 ‘선민주’라는 말로 민주주의야말로 평화, 인권, 번영 등 모든 기초라는 점을 가르쳐주었다. 민주로부터 바야흐로 통일로 이르는 도정에서 타계한 것은 정말로 마음으로부터 애석하다. 합장. 이토 나리히코 일본 주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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