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한국 민주주의’ 관심집중…지원활동 계기 마련
‘한국 민주주의’ 관심집중…지원활동 계기 마련
1973년 8월8일 일본 도쿄 도심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이 당사자인 김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영원한 미궁에 빠졌다. 일본 언론들은 김 전 대통령 서거 뒤 일제히 한-일 정부의 정치적 타협 사실 등을 적시하며 “진상이 밝혀질 날이 끝없이 멀어졌다”(<마이니치신문>)고 전했다.
한국 국가정보원 진상규명위원회는 2007년 10월 “한국 중앙정보부의 조직적 범행”라는 보고서를 발표했으나 전체적인 사건의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은 백주대낮 도심 한복판에 벌어진 이웃나라 야당 지도자의 납치라는 사실 자체의 충격뿐 아니라,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존재와 한국 사회의 정치현실에 대해 일본 지식인과 재일동포 사회, 정계가 큰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당시 ‘김대중납치사건 대책 진상규명위’의 사무국장을 맡았던 김성호(73)씨는 21일 <한겨레>와 통화에서 “당시 일본 지식인들은 남한은 미국의 괴뢰정부로 생각해 한국을 무시하거나 현실을 잘 모르고 있었다”면서 “납치사건은 김대중이라는 훌륭한 정치가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을 일본 지식인들에게 깨닫게 해준 큰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납치 당일 김 전 대통령을 특집으로 다룬 <세계> 9월호가 발매된 것도 납치사건의 충격파를 증폭시켰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대담기사에서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 음모를 폭로하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역설했다. <세계>의 오카모토 아쓰시 편집장은 “당시 <세계> 잡지는 발매되자마자 엄청난 관심을 받아 수십만권이 팔렸다”고 회고했다.
와다 하루키, 이토 나리히코 등 대학 교수들은 한국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지원 활동을 펼치게 된 데는 납치사건과 김대중씨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당시 와세다대 학생이었던 강중상 도쿄대 교수도 매일같이 한국대사관 앞에서 항의데모를 펼쳤다고 자신의 저서 <자이니치>에서 밝혔다. 강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남북화해 노력에 크게 공감하고 여러 차례 그와 인터뷰를 했다.
일본 정부의 조문단 대표로 결정된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도 납치사건과 인연이 깊다. 고노 전의장은 사건발생 당일 오후 2시 자신이 속해있던 국회의원 모임인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에 김 전 대통령을 연사로 초청한 상태했으나 납치당한 사실을 알고 경시청에 연락해 구명운동에 적극 동참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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