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세를 일기로 18일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긴 정치인생 대부분을 '투사형 정치인'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여건 탓에 야당시절엔 재계와의 인연이 별다른 게 없었다.
하지만 1998년 김 전 대통령이 집권한 후 5년간 재계는 그리 편치않은 시절을 보내야 했다.
'대마불사(大馬不死)'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진행된 강력한 재벌개혁과 '빅딜', 그리고 이로 인해 촉발된 재계 지도의 대변화 때문이다.
저서 '대중경제론' 등을 통해 관치경제의 청산과 개발연대에 이뤄진 경제력 집중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김 전 대통령은 집권 직후 외환위기까지 겹치자 당선자 시절이었던 1998년 1월 재벌 총수들과 만나 "경영역량을 주력 핵심사업에 집중해줄 것"을 요구했다.
재계 측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그는 집권후 경제단체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기업은 남들이 욕심내는 좋은 기업을 내놔야 한다"며 재차 구조조정을 촉구했고 정부는 개발연대에 빚으로 성장해온 재벌들에게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라고 요구하며 재계를 압박했다.
4대 개혁대상의 하나였던 재계(기업)에 경영투명성 제고와 상호보증채무 해소, 재무구조 개선, 업종 전문화, 경영자 책임강화 등 5개항의 실천과 제2금융권 경영지배구조 개선, 순환출자 및 부당내부거래 억제, 변칙상속 차단 등 3개항을 담은 '5+3원칙'도 제시됐다.
결국 계속된 개혁 압력에 밀린 이 해 9월 재계는 5대 그룹, 8개 업종 '빅딜안(案)'을 내놓게 된다.
현대전자와 LG반도체를 합병해 단일법인을 설립하는 것을 필두로 자동차,조선,철강,건설중장비,공작기계업종과 울산 및 여천석유화학단지의 구조조정안을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렵게 성사된 '빅딜'은 정부의 강력한 정책적 지원 속에 현재의 재계 지도를 창출해낸 기본 모델이 됐지만 그 후 결과만을 놓고보면 성공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평가가 많다.
현대그룹과 LG그룹의 신경전 끝에 LG가 반도체를 내놓은 격이 됐지만 현대전자는 결국 막대한 적자에 시달리다 현대그룹 워크아웃 과정에서 주인이 채권단으로 바뀌었고 구조조정을 거쳐 현재의 하이닉스반도체로 다시 탈바꿈을 했지만 아직 '주인찾기'는 이뤄지지 못했다.
각각 보유하고 있던 전자와 자동차를 한 쪽에 몰아주는 것을 골자로 했던 삼성과 대우간 '빅딜'도 실패해 삼성자동차는 법정관리 신청을 거쳐 결국 프랑스 르노로 넘어갔고 대우는 이듬해 결국 그룹이 통째로 워크아웃에 들어가 공중분해된다.
대우자동차는 한 때 인수의사를 보였던 포드의 인수포기로 제너럴 모터스(GM)로 넘어갔지만 이제 주인인 GM이 구조조정의 위기를 겪고 있고 대우전자(현 대우일렉트로닉스)는 하이닉스와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주인을 찾지 못한 상태다.
김 전 대통령의 취임과 비슷한 시기에 재계 수장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았던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도 그룹 공중분해와 함께 그해 10월부터 종적을 알리지 않은 채 2005년 6월까지 해외 도피생활을 해야했다.
철도차량과 발전설비,항공기산업 빅딜도 산업의 성장이나 시장경쟁이라는 측면에서 평가가 엇갈렸다.
이 때문에 국민의 정부 말기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내기도 했던 전윤철 전 부총리마저 국회 국정감사에서 "빅딜은 좋은 시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도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이제 '과거지사'가 됐다.
전경련은 논평에서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에 큰 발자취를 남겼고, 외환위기 때는 해외 투자 유치에 적극 나서 경제의 조기 회복에 기여했다"고 평가했고 대한상의도 "민주주의의 정착과 남북화해협력을 위해 평생을 바쳤고 외환위기시에 우리의 경제체질을 강화하고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내놨다.
김종수 기자 jsking@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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