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울고 웃은 가족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0년 사형 선고를 받고 옥중에서 쓴 첫 편지에 “세속적으로 볼 때 나는 결코 좋은 남편도 못되며, 좋은 아버지도 못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제·친척들에게 얼마나 많은 누를 끼쳤습니까”라고 썼다. 보통 크기의 엽서 한 장에 1만4000자를 깨알같이 써 넣어 확대경을 이용해야 읽을 수 있는 이 편지들에는 가족에 대한 애틋함과 죄책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 전 대통령의 가족사는 그의 삶 만큼이나 굴곡져 있다. 그는 아버지에게 ‘불효자’였다. 그는 가택연금 때문에 74년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45년 차용애씨와 결혼해 홍일(61·전 민주당 국회의원)·홍업(59)씨를 낳았지만, 59년 차씨와 사별했다. 막내 홍걸(46·미국 포모나대 태평양연구소 객원연구원)씨는 이희호(83)씨와 62년 재혼한 뒤 얻었다.
이희호씨는 김 전 대통령의 반려자이자, 정치적·사상적 동지였다. 자택에는 ‘김대중 이희호’라고 이름이 나란히 적힌 문패가 걸려 있었다. 이씨는 유복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미국 유학 뒤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로 사회 활동을 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번번이 낙선하고 부인과 사별한 채 어려운 생활을 하던 김 전 대통령과 만나,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고 일생을 함께했다.
장·차남 역시 어떤 의미에선 정치적 ‘동지’였다. 김홍일 전 의원(3선)은 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이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를 결성해 아버지를 도왔다. 홍업씨는 아버지의 수행비서로 정치에 입문한 뒤, 97년 대선 때는 홍보 업무를 맡아 당선에 공을 세웠다. 막내 홍걸씨만 97년 대선 전까지 미국 유학생으로 조용히 지냈다.
하지만 한국의 대통령들에게 장성한 자식들은 늘 ‘멍에’였고, 김 전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 아들은 권력형 비리에 줄줄이 연루됐다. 홍걸씨는 2002년 5월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등과 관련해 기업들한테서 청탁과 함께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같은 해 6월 홍업씨도 비슷한 혐의로 구속돼,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2003년 9월 우울증 등의 증세로 형집행정지 될 때까지 복역했다. 김홍일 전 의원 역시 2003년 나라종금 로비 사건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았고, 2006년 9월 집행유예 3년의 형이 확정돼 의원직을 잃었다. 김 전 대통령은 홍걸·홍업씨가 차례로 구속된 뒤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절하게 느껴왔으며, 국민들께 마음의 상처를 드린 데 대해 부끄럽고 죄송한 심정으로 살아왔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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