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의 저가발행에 대해 유죄를 선고 받은 이건희 전 삼성회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에 들어서면서 보안검색을 받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건희 전 회장 배임 유죄 ‘봐주기’ 넘어 스스로 권위 허물어
일반인이었다면 집유 불가능 “형량 정해놓고 법 논리 짜기”
1억 받은 공무원 징역 3년6개월 456억 포탈한 ‘회장님’은 집유
일반인이었다면 집유 불가능 “형량 정해놓고 법 논리 짜기”
1억 받은 공무원 징역 3년6개월 456억 포탈한 ‘회장님’은 집유
서울고등법원은 14일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파기환송심 판결에서 삼성에스디에스(SDS) 신주인수권부사채 헐값 발행이 불법이고 이 전 회장은 유죄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200억원대의 배임 행위를 인정하고도 갖은 논리를 동원해 이 전 회장에 대한 실형 선고를 피해 갔다. 이번 판결은 같은 법원의 일부 판사들도 “부끄럽다”고 할 정도로 형사사법의 일반 원칙에 어긋나는 대목이 많아 사법부의 불명예로 남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 유죄, 그러나 전례 찾기 어려운 형량 판단 경제개혁연대 등은 재판부가 삼성에스디에스 주식의 적정 가격을 판단하면서, 1심과 달리 기업 수익가치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유가증권 인수업무에 관한 규정’에 따라 주가를 산정한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고 밝혔다. 당시 삼성에스디에스는 장외에서 주당 최고 5만5000원 안팎에 거래되던 주식을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 등에게 주당 7150원에 넘겼다. 재판부는 과거 국세청과 서울행정법원이 인정하고 조준웅 특별검사가 적용한 주당 5만5000원(배임액 1539억원)보다 한참 낮은 주당 1만4230원을 적정가로 봤지만, 이로써 배임액은 1심의 44억여원(공소시효 7년)에서 공소시효 10년을 적용할 수 있는 227억원으로 늘었다.
하지만 조세포탈과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이미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이 전 회장에게 227억원의 배임행위를 추가로 인정하고도 형량을 그대로 유지했다는 점에서 기존 판결 관행과 상식을 깼다. 일부에서 ‘하나 마나 한 판결’이라는 혹평이 나오는 이유다.
애초 이 사건에 유죄 판단이 내려지면, 이 전 회장의 법정구속 여부와 별개로 실형 선고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많았다. 서울지역의 한 부장판사는 “지난해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한 것을 두고 ‘유죄가 하나라도 추가되면 구속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재판부가 징역 3년에 집착한 것은 집행유예를 선고하려는 고육책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형법상 형량이 징역 3년을 초과하면 집행유예를 붙이는 게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법조계에서는 만약 일반인이 이 전 회장 정도의 조세포탈을 한 사실이 인정됐다면, 집행유예 선고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이날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9400만원어치의 백화점 상품권을 받은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징역 3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것만 놓고 봐도, 이 전 회장 사건 재판부의 형량 판단이 얼마나 관대한 것인지가 분명해진다.
■ ‘봐주기’ 요소 총동원 이 전 회장에게 ‘관용’을 베풀려는 재판부의 적극적인 의지는 판결문 곳곳에서 드러난다. 재판부는 집행유예를 선고한 이유에 대해 “배임에 대한 책임은 1주당 손해액을 1차 기준으로, 전체 손해액을 2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적정가의 절반 정도에 주식을 저가발행을 했다고 해서 그 정도가 지나치게 심한 경우로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앞서 적정 주가 산정 과정을 설명하면서는 “현저히 불공정한 가액으로 주식을 발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를 폈다. 한 부장판사는 “형량과 공소시효는 배임 총액이 얼마냐에 따라 달라진다”며 “주당 손해액이 1차 기준이라는 것은 법률 취지에 맞지 않는 얘기”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 “당시 신주인수권 행사의 적정가를 정하는 법령이나 판례 등이 없어 삼성이 위법성을 인식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이 전 회장을 두둔했다. 하지만 당시 삼성이 ‘신종 수법’으로 헐값에 경영권을 넘기려 했다는 시민단체들의 지적은 간과했다.
재벌 봐주기 판결 때 흔히 등장하는 논리는 이번에도 빠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전 회장이 삼성에스디에스에 배임액 이상의 돈을 납부해 손해를 회복했으며, 기업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점을 참작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전 회장이 삼성에스디에스에 배상했다고 주장하는 1500여억원은, 실제 납부 여부가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제기된 상태다. 이 전 회장이 선처를 받기 위해 허위 변제를 했다는 의혹마저 나오는 상황에서 삼성 쪽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진작 기소된 이 전 회장에게 적용할 수는 없지만, 대법원은 최근 피해액이 50억원 이상이면 원칙적으로 실형을 선고하도록 한 ‘배임죄 양형 기준’을 발표하며 “유전무죄 시비를 불식시키고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엄정한 양형을 구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기준에는 △대량피해자(주주 등) 발생 △배임 교사 △지배권 강화 목적 △증거 은폐 등의 행위에 형량을 가중하도록 돼 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진작 기소된 이 전 회장에게 적용할 수는 없지만, 대법원은 최근 피해액이 50억원 이상이면 원칙적으로 실형을 선고하도록 한 ‘배임죄 양형 기준’을 발표하며 “유전무죄 시비를 불식시키고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엄정한 양형을 구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기준에는 △대량피해자(주주 등) 발생 △배임 교사 △지배권 강화 목적 △증거 은폐 등의 행위에 형량을 가중하도록 돼 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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