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박원순 변호사 등 잇따른 ‘국정원 개입설’ 제기
한 대기업서 ‘환경재단 후원자료’ 뽑아가기도
일부 “내년 선거 앞두고 보수단체 힘싣기” 분석
한 대기업서 ‘환경재단 후원자료’ 뽑아가기도
일부 “내년 선거 앞두고 보수단체 힘싣기” 분석
진보시민단체 돈줄 죄는 정부 “흡사 안개가 점점 더 짙어지는 느낌이다. 어둠 속에서 형체 없는 안개가 시민·사회단체들의 목을 조르는 형국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한 시민사회 진영의 대표적인 인사는 최근 시민·사회단체들이 느끼는 위기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희미하게 어른거리던 짙은 안갯속의 ‘실체’가 국정원이라는 인식이 최근 들어서 점점 굳어지고 있다. 시민사회 진영에선 올해 초부터 진보 성향 단체를 겨냥한 ‘돈줄 죄기’가 “매우 교묘하게, 매우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입을 모아왔다. 정부 부처가 지원하는 민간 공익사업을 보면, 약속이나 한 듯 올해부터 ‘신규 사업자’ 우선 원칙을 내세웠다. 해당 분야의 전문성과 사업 능력을 먼저 따지던 이전과는 180도 달라진 것이다. 갑자기 심사 원칙을 바꾼 이유에 대해선, “적격성만 따지면 매년 똑같은 단체만 선정된다”(노동부), “예산이 확대돼 신규 사업자한테 기회를 늘렸다”(보건복지가족부)고 해명했다. 그러나 심사 결과를 보면, 신청 단체의 성향에 따라 ‘선택적 물갈이’가 이뤄졌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렵다. 노동부의 ‘사회적기업 교육사업’의 경우, 지난해 상위 점수를 받은 진보 성향의 성공회대·한겨레경제연구소·세스넷 등이 줄줄이 탈락했다. 반면 보수 성향의 사회적기업연구원, 민생경제정책연구소 등은 재선정되거나 새로 진입했다. 이영환 성공회대 부총장은 “이 사업은 이념과 상관없이 경영·교육 전문기관들이 수행해 왔는데, 올해 느닷없이 자의적인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며 검증된 기관들을 탈락시키고 무경험 단체들을 선정했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기준 ‘전문성’ 대신 ‘신규사업자’ 우선
우연치곤 공교롭게 ‘진보단체 배제’ 결과로
전문성·사업능력 따지던 전과는 180도 거꾸로
조직적인 ‘진보단체 배제-보수단체 밀어주기’ 현상의 뒤엔 외압의 흔적이 뚜렷하다. 이영환 성공회대 부총장은 “오랫동안 같이 일하던 정부 담당자가 ‘(지원서를) 넣어도 안 되니까 넣지 말라’고 했다. 부처 담당자가 어쩔 수 없는 ‘윗선’이라면 누구를 뜻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한겨레경제연구소의 핵심 간부는 “평소 잘 알던 청와대 관계자가 ‘사회적기업 교육사업을 이념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육사업인데 이데올로기가 관련되니 (진보 쪽으로) 가선 곤란하다고 한다. 미안하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시민·사회단체의 재정을 압박하는 또다른 사건은, 정부 또는 기업의 후원이 갑자기 끊기는 일이다. 시민사회 진영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국가정보원을 지목하고 있다. 박원순 변호사(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지난주에 ‘국정원 개입설’을 공개적으로 제기한 데 이어, 이미경 환경재단 사무총장은 좀더 구체적인 정황을 제시했다. 서울시의 고위 간부에게 국정원 조정관이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다는 얘기를 직접 서울시 인사로부터 들었다고 이 총장은 밝혔다. 박 변호사와 이 총장의 발언은, 국정원이 시민·사회단체의 사업 전반에 광범위하게 개입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런 맥락에서 “국정원이 시민단체 후원금 내역을 요청했다”는 대기업 대외협력 담당 간부의 발언은 시사적이다. 이 간부가 국정원 직원의 요청으로 자료를 팩스로 보낸 시기는 지난해 12월 최열 환경재단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가 한창일 때였다. 이 간부는 “검찰이 우리 회사의 환경재단 후원 내역을 조사했는데, 그 자료를 국정원에서 요구해 협조 차원에서 보내줬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검찰 수사에 대한 정보 수집 차원일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런 행위는 명백히 불법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5부는 지난달 29일 주수도 제이유(JU)그룹 회장이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정원법 제3조에 규정된 국외정보 및 국내보안정보(대공·대정부전복·방첩·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의 수집·작성 및 배포 등에 관한 직무에 속하지 않는 정보수집 행위는 위법하다”며 국가에 손해배상 책임을 지운 바 있다. 또 이렇게 수집된 후원금 내역은 거꾸로 시민·사회 진영의 재정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언제든 활용될 수 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정부뿐 아니라 민간 기업의 시민단체 지원에 잇따라 제동이 걸리면서, 은밀하지만 광범위하게 ‘재정 목조르기’가 진행되고 있다. 비판세력을 재정적으로 압박해 고사시키려는 시나리오가 본격화한다는 주장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비판세력의 발을 묶으면서 보수 성향의 외곽단체를 키우려는 의도라는 분석도 있다.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약속이나 한 듯이 공익사업의 주체를 바꾸는 건, 보수 단체들에게 (활동을 위한) 실탄을 지급하려는 뜻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회승 기자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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