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아들 이윤식(당시 19살)씨, 이삼숙씨
‘6·3 사태’ 때 숨진 아들 졸업장 받는 이삼숙씨
여든 다섯의 노모 이삼숙(큰 사진)씨는 45년 전 큰 아들 이윤식(당시 19살·작은 사진)씨를 마지막 본 날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계엄령 탓에 ‘혼수상태 아들’ 임종도 못해
이윤식씨 민주화운동 인정…8일 명예졸업장 1964년 6월4일 그는 평소처럼 장을 보러 나섰다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아들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남 광주에서 서울까지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워 올라왔지만 마침 계엄령이 선포된 탓에 여관에 발이 묶여 임종도 하지 못했다. 서울대병원에 도착해 병실로 뛰어가보니 아들은 홑이불을 뒤집어 쓴 채 호흡기로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그는 “간호사를 붙들고 많이도 울었다”고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틀 뒤 윤식씨가 숨지자 당시 경찰은 유족과 상의도 없이 서울 망우리공동묘지에 서둘러 묻어버렸다. 부모는 무너진 가슴만 안고 광주로 되돌아 와야 했다. 윤식씨는 ‘굴욕적인 한·일 수교 반대’를 외치며 5만여 학생·시민들이 일어선 ‘6·3 항쟁’에 참여했다가, 달리던 트럭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세상을 달리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이씨는 49일 동안 날마다 왕복 5시간의 무등산 광덕사에 올라 아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곤 어두운 터널 속에 있는 것같은 긴 세월이 흘렀다. “자라던 나무의 중간을 끊어 놓으면 어떻겠어요. 장손을 잃은 집안이 꼭 그와 같았어요.” 그러던 어느날 밤 꿈에 아들이 찾아왔다. 훤칠한 키에 백옥같은 양복을 입은 아들은 울타리 밖에서 두 주먹을 굳게 쥐고 늠름하게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은 그 뒤 다시는 꿈에 나타나지 않았어. 그 뒤부터는 나도 일부러 밝게 살았지.”
이씨는 오는 8일 다시 서울을 찾는다. 아들 이씨가 다니던 건국대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받는 날이다. 이날은 마침 어버이날이자 이씨의 생일(음력 4월14일)이기도 하다. 윤식씨는 올해 2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명예를 되찾으면서 45년만에 어머니에게 졸업장을 안겨주게 되었다. 이씨는 “내가 죽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인데. 살다보니 다시 빛을 보는 날이 온다”고 말했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이윤식씨 민주화운동 인정…8일 명예졸업장 1964년 6월4일 그는 평소처럼 장을 보러 나섰다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아들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남 광주에서 서울까지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워 올라왔지만 마침 계엄령이 선포된 탓에 여관에 발이 묶여 임종도 하지 못했다. 서울대병원에 도착해 병실로 뛰어가보니 아들은 홑이불을 뒤집어 쓴 채 호흡기로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그는 “간호사를 붙들고 많이도 울었다”고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틀 뒤 윤식씨가 숨지자 당시 경찰은 유족과 상의도 없이 서울 망우리공동묘지에 서둘러 묻어버렸다. 부모는 무너진 가슴만 안고 광주로 되돌아 와야 했다. 윤식씨는 ‘굴욕적인 한·일 수교 반대’를 외치며 5만여 학생·시민들이 일어선 ‘6·3 항쟁’에 참여했다가, 달리던 트럭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세상을 달리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이씨는 49일 동안 날마다 왕복 5시간의 무등산 광덕사에 올라 아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곤 어두운 터널 속에 있는 것같은 긴 세월이 흘렀다. “자라던 나무의 중간을 끊어 놓으면 어떻겠어요. 장손을 잃은 집안이 꼭 그와 같았어요.” 그러던 어느날 밤 꿈에 아들이 찾아왔다. 훤칠한 키에 백옥같은 양복을 입은 아들은 울타리 밖에서 두 주먹을 굳게 쥐고 늠름하게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은 그 뒤 다시는 꿈에 나타나지 않았어. 그 뒤부터는 나도 일부러 밝게 살았지.”
이씨는 오는 8일 다시 서울을 찾는다. 아들 이씨가 다니던 건국대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받는 날이다. 이날은 마침 어버이날이자 이씨의 생일(음력 4월14일)이기도 하다. 윤식씨는 올해 2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명예를 되찾으면서 45년만에 어머니에게 졸업장을 안겨주게 되었다. 이씨는 “내가 죽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인데. 살다보니 다시 빛을 보는 날이 온다”고 말했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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