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 표준 영정 한겨레 자료사진
[3·1운동 ‘90돌’]
해방 뒤 우파 개신교 ‘조선의 잔다르크’ 추앙
유신 정권 ‘안보의식 고취’ 대대적 성역화
해방 뒤 우파 개신교 ‘조선의 잔다르크’ 추앙
유신 정권 ‘안보의식 고취’ 대대적 성역화
유관순은 어떻게 항일투쟁을 상징하는 ‘국민 누나’가 됐을까. 정상우 박사(서울대 국사학과)는 언론 보도와 교과서, 정부기록물 등을 통해 ‘유관순 영웅 만들기’의 과정을 조명했다.
정 박사는 유관순에 대해 오늘날 같은 ‘구국 소녀’ 이미지가 형성된 것은 해방 이후라고 본다. 유관순의 존재는 모교 이화여중과 미군정, 우익 인사들의 주도로 기념사업회가 조직되고, 기념물 설립, 전기·영화 제작 등이 이뤄지면서 비로소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 1947년 9월 출범한 기념사업회는 미군정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이 명예회장을 맡고, 이승만·김구·김규식 등 우파 진영의 거물들이 고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초기 유관순 이미지의 특징은 기독교적 색채가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1948년 간행된 전기는 유관순을 ‘조선의 잔다르크’로 묘사했다. 정 박사는 “기념사업을 개신교 세력이 주도하면서 그는 신의 선택을 입고 조국해방에 목숨을 바친 애국적 인물로 그려졌다”고 분석했다.
기념사업의 목표였던 ‘유관순 정신’의 확산은 한국전쟁 종결 뒤 본격화하는데, 1954년 1차 교육과정이 마련되면서 유관순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독립된 단원으로 편성돼 ‘국민 누나’의 후광을 입게 된다. 정 박사는 “전쟁을 치른 뒤 정권에 의해 3·1운동의 정신이 ‘자유·반공 정신’ 등의 정치이념으로 구체화됐다”고 설명했다.
1960~70년대에는 유관순의 생가가 정비되고 사당이 설립되는 등 대대적인 성역화가 진행된다. 특히 1970년 10월 서울 남대문 앞에서 열린 동상 제막식은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참석한 국가행사로 치러졌다. 이 시기 3·1운동은 ‘총화단결’의 유신이념을 뒷받침하는 ‘전민족적 항거운동’으로 강조점이 변하는데, 정 박사는 “유관순 유적 성역화 역시 이순신 등에 대한 현창 사업과 마찬가지로 체제 유지를 위한 안보의식 고취 등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에 대해 김대호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유관순이 해방 직후 3·1운동의 대표적 아이콘으로 갑자기 등장했다면, 대중들 사이에는 유관순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서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식민지시기 잔다르크 이야기가 대중들 사이에 널리 유포돼 있었고, 유관순의 전기화 작업은 잔다르크의 이미지에 유관순을 꿰어맞추는 형태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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