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진 교수 (왼쪽) 브레너 교수 (오른쪽)
[대전환의 시대] 역사학 거장 로버트 브레너 UCLA 교수 대담
‘대전환’의 시대를 맞아 ‘자본주의는 어디로 가나’라는 물음에 답해 줄 네번째 목소리의 주인공은 로버트 브레너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UCLA) 교수다. 브레너 교수는 세계 역사학계에서 언제나 논쟁을 몰고 다니는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자, 이른바 ‘거품경제론’(버블노믹스)을 무기로 현대자본주의에 날선 비판을 해온 지식인이다. 브레너 교수와의 대담은 지난해 12월22일(현지시각) 저녁 미국 로스앤젤레스 샌타모니카의 한 호텔에서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진행했다. 이 대담에서 브레너 교수는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뿌리는 산업자본의 이윤율이 장기적으로 떨어진 데 있다는 논지를 폈다. ‘금융위기’의 본질은 ‘금융’이 아니라 ‘실물’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신흥공업국·중국 등장
전세계 공급과잉 심해져
산업자본 이윤율 하락 정성진 교수 대부분 언론과 경제평론가들이 현재의 위기를 ‘금융위기’라고 일컫는다. 금융위기란 말이 현재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나? 브레너 교수 사람들이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기 상황을 분석하면서 은행과 주식시장의 붕괴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좀더 본질적인 측면으로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들은 이번 위기를 금융부문의 문제로 설명하고 이른바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은 괜찮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만큼 잘못된 것도 없다. 오늘날 위기의 근본 원인은 지난 1973년 이후, 특히 2000년 이후 선진 경제권의 활력이 떨어진 데서부터 찾아야 한다. 미국과 서유럽, 일본의 경제적 성과는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일반적인 거시경제지표인 국내총생산(GDP)이나 투자, 실질임금 등은 경기순환 때마다 나빠졌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가장 최근에 끝난 경기순환 국면, 즉 2001년부터 2007년까지의 경기순환 국면이 2차 대전 시기를 통틀어 가장 미약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 기간에 미국 정부가 전시를 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로 경기부양책을 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정성진 당신은 이미 <혼돈의 기원>(1998)에서 지난 1973년 이후 제조업 부문에서 경쟁이 격화되면서 이윤율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세계경제가 ‘장기 하강’ 국면으로 들어갔다는 주장을 펴왔다. 방금 들려준 얘기는 최근의 경제위기 또한 이러한 세계경제 ‘장기 하강’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주장의 핵심은 과연 무엇인가?
브레너 1973년 이후 세계경제가 장기 하강세를 보이는 것은, 한마디로 자본이 챙겨갈 수 있는 이윤율이 1960년대 말부터 지속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윤율이 떨어진 주된 요인은 뭘까? 그 비밀은 바로 세계경제의 제조업 부문이 과잉설비라는 덫에 빠져든 데 있다. 새로운 제조업 강국들, 예컨대 독일과 일본, 동북아시아의 신흥공업국, 남아시아의 ‘호랑이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중국이라는 거인이 잇따라 세계시장에 진입하지 않았나. 이들 후발 경제성장국들은‘선발 국가’들이 이전에 생산했던 것과 동일한 재화들을 더욱 싼값에 생산해냈다. 그 결과 여러 산업부문에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많아졌고, 이는 제품 가격을 떨어뜨리는 압력 요인으로 작용해 당연히 이윤마저 압박했다. 그러자 기업들은 혁신능력에 기대거나 혹은 신기술에 대한 투자를 가속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로 인해 과잉설비 문제는 되레 악화됐을 뿐이다. 결국 그들은 설비와 투자, 고용 증가세를 둔화시키는 것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나마 수익성을 최대한 방어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동결했고, 정부로 하여금 사회지출을 삭감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이냐? 장기적으로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총수요의 부족’이라는 문제를 불러왔을 뿐이다.
1970년대이후 장기하강
자산 거품 키워 막으려다
‘총수요 부족’ 되레 심화
정성진 자본주의가 70년대 이후 장기 하강 국면으로 들어갔다는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흔히 ‘자본의 반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80년대 이후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이같은 장기 하강 추세를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저지한 것 또한 사실 아닌가? 브레너 만일 신자유주의가 단지 규제 완화와 금융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것을 뜻한다면, 그것이 경제 회복에 보탬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 그리고 복지국가 시스템에 대해 자본의 공격 강화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앞서 말한 이윤율 저하 추세를 어느 정도 저지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이러한 ‘자본의 반격’은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1980년대 이전에 이미 시작됐다는 점이다. 1970년대 초 이윤율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자본은 곧장 반격에 나섰다. 그럼에도 이윤율은 회복되지 않았고 총수요 부족 문제만 더욱 악화시켰다. 이때 정책 당국자들이 들고 나온 무기가 있다. 더욱 강력하면서도 더욱 위험한 형태의 경기 부양책이었는데, 바로 ‘자산가격 케인스주의’(Asset Price Keynesianism)라 불릴 만한 것이다. 자산시장의 거품을 키워 쪼그라든 소비를 회복시키겠다는 게 기본 발상이다. 바로 오늘날의 대재앙을 불러온 싹이다. 정성진 실제로 이번 위기를 촉발한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10년 동안 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팽창했던 부동산시장 거품이 마침내 터진 것이다. 부동산시장의 팽창과 뒤이은 폭발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위기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봐야 하나? 브레너 앞서 말한 대로 경제가 장기 하강 국면에 들어서자 정책 당국은 총수요 부족의 문제를 공적·사적 차입의 증대를 조장하는 방식으로 풀려고 했다. 처음에는 주로 정부의 재정적자에 의존하다가 한계에 부닥치자 1990년대 초에 이르러 정책방향 전환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정책담당자들은 경제를 다시 팽창시키기 위해 1980년대 말 일본이 택했던 카드를 꺼내들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이자율을 낮춰 차입을 쉽게 만들어줬고, 이를 통해 금융자산에 대한 투자를 장려했다. 그다음 스토리는 너무도 잘 알 것이다. 자산가격이 치솟자 기업과 가계의 부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적어도 장부상으로는 말이다. 이들 기업과 가계는 어머어마한 규모로 차입을 늘렸고, 이를 무기로 투자와 소비를 크게 증가시켜 경제를 끌고 나갔다. 민간적자가 공공부문의 재정적자를 고스란히 대체한 꼴이다. 바로 전통적인 케인스주의가 물러난 자리에 ‘자산가격 케인스주의’가 들어선 것이다. 세계경제는 지난 10여년 동안 매우 특이하게도, 사상 유례없는 투기 파동으로 자본축적이 진행되는 경험을 했다.
케인스식 ‘재정투입’으론 위기탈출 못해
정성진 일부 논자들은 지난 80년대 이후 금융부문이 경제발전을 주도하는 ‘금융화’ 현상이 뚜렷해졌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자본주의가 ‘금융주도형 자본주의’ 형태로 변모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이런 주장들은 여전히 현재 위기를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 때문이라기보다는 ‘금융화된’ 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브레너 ‘금융주도형 자본주의’란 용어는 앞뒤가 맞지 않는 표현이다. 기본적으로 금융부문의 이윤이라 하더라도 결국엔 실물부문에서 지속적으로 이윤을 창출해내는 것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나라들의 정부가 실물부문의 이윤율 하락이라는 난관에 봉착하자 금융부문의 규제완화를 통해 경제의 무게중심을 금융부문으로 옮기도록 부추겼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실물경제가 계속 악화일로를 걸었기 때문에 규제를 완화하더라도 금융부문의 경쟁은 더욱 격화됐고 그만큼 이윤창출의 기회는 더욱 줄어들었다. 투기가 더욱 극성을 부리고 모든 사람들이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마인드로 바뀐 건 자연스런 결과일 뿐이다. 70년대 이후 이른바 ‘금융팽창’은 매차례 금융위기라는 재난으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대규모 구제금융으로 이어졌다. 70년대와 80년대 초 제3세계에 대한 대출 붐, 80년대 미국 저축대부조합들의 대출 붐과 차입인수(LBO) 광풍, 상업부동산 거품, 90년대 후반의 주식시장 거품, 그리고 2000년대의 주택과 신용시장 거품 사례를 봐라. 금융부문이 마치 ‘독자적인’ 동력을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결같이 정부가 이들을 지원해준 결과였다.
대공황보다 상황 악화 가능
그동안 경제성장 전적으로
소비·부동산 투자에만 의존 정성진 가까운 예만 들더라도, 당신은 2001년의 불황 뿐 아니라 이번 위기도 미리 정확하게 예측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번 위기는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으로 보나? 이번 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모습을 대략 그려달라. 브레너 이번 위기는 2차 대전 후 가장 심각한 불황이었던 1979~1982년 불황 때보다 더 심각한 상태고,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갈 정도로 악화될 수 있다. 대부분 경제예측가들이 현재 상황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들은 그동안 실물경제가 자산시장 거품과 부채 누적으로 지탱해왔다는 사실에 눈감고 있다. 경제성장은 거의 전적으로 소비와 부동산투자에 의존했을 뿐이다. 이 정도로 경제적 성과가 보잘 것 없었다. 부동산시장에는 거품이 잔뜩 끼었고 부시 정부가 엄청난 재정적자를 감수하며 경기를 부채질했는데도 그 정도 성과밖에 내지 못했다. 2001~2005년에 미국 국내총생산(GDP) 성장의 3분의1과 고용증가의 절반은 부동산 부문에서 비롯됐다. 부동산시장 거품이 터지자, 소비와 투자가 줄어들고 경제가 곤두박질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정성진 이번 위기를 겪으면서 지난 30년간 위세를 떨쳤던 신자유주의 시대가 저물고 케인스주의 혹은 국가주의가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등장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때마침 오바마 정부의 등장과 함께 이런 움직임에도 탄력이 붙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현재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특정한 형태의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이므로 단지 케인스주의나 국가주도형 발전전략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워 보인다. 당신이 지금까지 들려준 얘기도 이런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브레너 오늘날 각국 정부는 일단 케인스주의, 그리고 국가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위기에서 탈출하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시장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시장방임주의는 현재와 같은 경제 재앙을 막거나 대처하는 데 무능한 것으로 이미 판명났다. 하지만 케인스주의의 의미를 대규모 재정적자 정책, 그리고 총수요를 부양하기 위한 신용완화 정책 정도로 이해한다면, 과연 이런 정책들로 기대하는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짧게는 지난 7년 동안 부동산시장 거품을 조장한 연준의 정책, 그리고 부시 정부의 적자재정 정책 덕분에, 우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케인스주의적 경기부양책을 이미 경험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땠나? 바로 가장 미약한 수준의 경기순환 주기였을 뿐이다. 현재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다. 부동산시장의 거품이 꺼지고 대출 길이 막히면서 가계와 기업은 소비와 투자를 줄이고 있다. 기업의 이윤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기업 역시 임금을 삭감하고 일자리를 빠른 속도로 줄이고 있다. 총수요 감소와 이윤율 저하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경제가 한창 확장하던 시기에도 케인스주의가 경제를 안정적으로 끌고가는 데 실패한 마당에, 1930년대 이후 최악의 불황 상황인 지금 우리가 케인스주의로부터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오바마, 노동자 이익위한
결정적인 행동 취하려면
노동대중 조직화 필수적 정성진 오바마는 강력한 경제살리기에 나설 태세인데. 브레너 오바마 정부는 경제에 어떤 의미있는 자극을 주기 위해 결국 국가자본주의 형태의 대규모 직·간접 투자에 나설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엄청난 정치적·경제적 장애물을 넘어서야 한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정부지출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편이다. 또 정부지출과 국가부채가 대규모로 늘어난다면, 당연히 달러의 가치가 위협받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동아시아 나라의 정부들이 기꺼이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수지 적자를 메꾸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해줬다. 미국의 소비수준 유지가 자국의 대미 수출에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중국마저 경제위기의 영향권 아래 들어서고 있지 않나. 동아시아 나라 정부들이 미국의 적자를 메꿔주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 규모가 지금보다 몇 배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달러 투매라는 공포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지 않을까. 정성진 이제 오바마 시대가 공식적으로 열렸다. 오바마는 ‘21세기의 루즈벨트’를 자처하며 ‘새로운 뉴딜’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오바마 정부에 대해선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 궁금하다. 브레너 오바마의 집권은 당연히 환영할 일이다. 만일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가 당선되었더라면 미국 정치에서 가장 반동적인 세력에게 엄청난 힘을 실어주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또 부시 정부가 보여준 극단적인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뿐 아니라, 노동조합과 복지국가, 환경보호 정책의 마지막 흔적까지 없애려는 이들의 의도를 승인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길 수 없는 건 오바마 역시 루스벨트와 마찬가지로 민주당 중도파라는 점이다. 따라서 오바마는 혼자서는 노동 대중 다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오늘날 대다수 노동대중은 쪼그라든 이윤을 일자리 감축과 임금 삭감 등을 통해 벌충하려는 기업들로부터 강력한 공격을 받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오바마는 미국 역사상 ‘납세자에 대한 최대 규모의 약탈’이라고 불리는 금융구제안을 지지했다. 오바마는 또 자동차산업 구제금융 법안도 지지했다. 이 구제금융안이 자동차산업 노동자 임금을 대폭 삭감하는 것을 조건으로 했는데도 말이다. 분명한 것은 루스벨트와 마찬가지로, 오바마는 노동대중이 ‘아래로부터’ 조직화된 직접 행동을 통해 압력을 행사할 경우에만 노동대중의 이익을 지키기위한 결정적인 행동에 나설 것이란 사실이다. 루스벨트가 그러지 않았나. 실제로 루즈벨트 정부는 대중 파업의 거대한 물결 속에 압박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등을 강화하는 1933년의 와그너법을 비롯해 사회보장제도 등 진보적인 색채의 각종 뉴딜 법안을 통과시켰다. 오바마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되풀이되지 않겠는가.
정리 최우성 이세영 기자 morgen@hani.co.kr
■ 브레너 교수의 이론은 브레너 교수의 주장은, 1970년대 이후 세계시장에서 제조업 부문간 경쟁이 심해지면서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이 누적돼 자본이 거둘 수 있는 이윤율이 장기적으로 떨어졌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임금 상승에 따른 이윤 압박 등으로 설명해왔던 기존 좌파 경제학의 통설을 뒤집은 것이다. 세계경제가 활력을 잃은 것은 한마디로 각국의 자본이 벌이는 무한경쟁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1998년 펴낸 <혼돈의 기원>에서 “어떠한 실질임금의 성장도 표용할 수 없는 자본의 무능력”이 경제 위기의 실제 원인임을 꼬집었다. 이런 주장을 두고 좌파 경제학자들은 물론 역사학계 전반에서 엄청난 논쟁이 벌어졌다. ‘제조업 이윤율 저하’ 위기 근본
‘임금상승이 문제’ 통념 뒤집어 세계경제가 위기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면서, 그의 분석과 이론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진보학술지인 <신좌파평론>은 지난해 11·12월호에서 브레너의 2006년 역작 <전지구적 혼돈의 경제학>을 토대로 3명의 학자들로부터 제기된 비판을 특집호로 꾸몄다. 유례없는 경제위기의 한가운데서 ‘3차 브레너 논쟁’의 싹이 움트고 있는 셈이다. 특히 3명의 비판가 가운데는 <한겨레>의 특별기획 - ‘대전환’의 시대, 세계 석학과의 대담 두 번째 주인공인 미셸 아글리에타 파리 10대학 교수도 포함돼 있다. 아글리에타 교수는 브레너 교수가 주장하는 제조업 부문 이윤율의 장기 하락은 미국의 경우에만 해당할 뿐, 유럽과 일본 자본주의에는 곧장 적용되기 힘들다는 내용의 비판 논문을 실었다. 브레너 교수는 <한겨레>와 이번 대담에서 자신에게 제기된 다양한 비판에 대해 열띤 반론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브레너 교수가 그 내용이 곧 출간될 <신좌파평론> 3·4월호에 담길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간곡하게 비공개를 요청한 터라, 지면에는 아쉽게도 담지 못했다. 다만, 브레너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회복과정과 중국 경제의 성장이 세계경제에 더욱 깊숙하게 통합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강조하면서, 전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심화할수록 한국과 중국은 심각한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마지막으로 브레너 교수는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요즘 유행하는 케인스주의적 정책 대안을 모색하기보다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조직을 건설하는 데 더욱 힘써야 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최우성 기자 [전문 보기 / 영문으로 보기]
전세계 공급과잉 심해져
산업자본 이윤율 하락 정성진 교수 대부분 언론과 경제평론가들이 현재의 위기를 ‘금융위기’라고 일컫는다. 금융위기란 말이 현재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나? 브레너 교수 사람들이 현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기 상황을 분석하면서 은행과 주식시장의 붕괴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좀더 본질적인 측면으로 깊이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들은 이번 위기를 금융부문의 문제로 설명하고 이른바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은 괜찮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만큼 잘못된 것도 없다. 오늘날 위기의 근본 원인은 지난 1973년 이후, 특히 2000년 이후 선진 경제권의 활력이 떨어진 데서부터 찾아야 한다. 미국과 서유럽, 일본의 경제적 성과는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일반적인 거시경제지표인 국내총생산(GDP)이나 투자, 실질임금 등은 경기순환 때마다 나빠졌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가장 최근에 끝난 경기순환 국면, 즉 2001년부터 2007년까지의 경기순환 국면이 2차 대전 시기를 통틀어 가장 미약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 기간에 미국 정부가 전시를 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로 경기부양책을 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자산 거품 키워 막으려다
‘총수요 부족’ 되레 심화
정성진 자본주의가 70년대 이후 장기 하강 국면으로 들어갔다는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흔히 ‘자본의 반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80년대 이후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면서 이같은 장기 하강 추세를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저지한 것 또한 사실 아닌가? 브레너 만일 신자유주의가 단지 규제 완화와 금융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것을 뜻한다면, 그것이 경제 회복에 보탬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 그리고 복지국가 시스템에 대해 자본의 공격 강화를 뜻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앞서 말한 이윤율 저하 추세를 어느 정도 저지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이러한 ‘자본의 반격’은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불리는 1980년대 이전에 이미 시작됐다는 점이다. 1970년대 초 이윤율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자본은 곧장 반격에 나섰다. 그럼에도 이윤율은 회복되지 않았고 총수요 부족 문제만 더욱 악화시켰다. 이때 정책 당국자들이 들고 나온 무기가 있다. 더욱 강력하면서도 더욱 위험한 형태의 경기 부양책이었는데, 바로 ‘자산가격 케인스주의’(Asset Price Keynesianism)라 불릴 만한 것이다. 자산시장의 거품을 키워 쪼그라든 소비를 회복시키겠다는 게 기본 발상이다. 바로 오늘날의 대재앙을 불러온 싹이다. 정성진 실제로 이번 위기를 촉발한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 10년 동안 사상 유례없는 규모로 팽창했던 부동산시장 거품이 마침내 터진 것이다. 부동산시장의 팽창과 뒤이은 폭발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위기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봐야 하나? 브레너 앞서 말한 대로 경제가 장기 하강 국면에 들어서자 정책 당국은 총수요 부족의 문제를 공적·사적 차입의 증대를 조장하는 방식으로 풀려고 했다. 처음에는 주로 정부의 재정적자에 의존하다가 한계에 부닥치자 1990년대 초에 이르러 정책방향 전환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정책담당자들은 경제를 다시 팽창시키기 위해 1980년대 말 일본이 택했던 카드를 꺼내들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이자율을 낮춰 차입을 쉽게 만들어줬고, 이를 통해 금융자산에 대한 투자를 장려했다. 그다음 스토리는 너무도 잘 알 것이다. 자산가격이 치솟자 기업과 가계의 부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적어도 장부상으로는 말이다. 이들 기업과 가계는 어머어마한 규모로 차입을 늘렸고, 이를 무기로 투자와 소비를 크게 증가시켜 경제를 끌고 나갔다. 민간적자가 공공부문의 재정적자를 고스란히 대체한 꼴이다. 바로 전통적인 케인스주의가 물러난 자리에 ‘자산가격 케인스주의’가 들어선 것이다. 세계경제는 지난 10여년 동안 매우 특이하게도, 사상 유례없는 투기 파동으로 자본축적이 진행되는 경험을 했다.
브레너 교수
그동안 경제성장 전적으로
소비·부동산 투자에만 의존 정성진 가까운 예만 들더라도, 당신은 2001년의 불황 뿐 아니라 이번 위기도 미리 정확하게 예측한 사람으로 꼽힌다. 이번 위기는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으로 보나? 이번 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모습을 대략 그려달라. 브레너 이번 위기는 2차 대전 후 가장 심각한 불황이었던 1979~1982년 불황 때보다 더 심각한 상태고,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갈 정도로 악화될 수 있다. 대부분 경제예측가들이 현재 상황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들은 그동안 실물경제가 자산시장 거품과 부채 누적으로 지탱해왔다는 사실에 눈감고 있다. 경제성장은 거의 전적으로 소비와 부동산투자에 의존했을 뿐이다. 이 정도로 경제적 성과가 보잘 것 없었다. 부동산시장에는 거품이 잔뜩 끼었고 부시 정부가 엄청난 재정적자를 감수하며 경기를 부채질했는데도 그 정도 성과밖에 내지 못했다. 2001~2005년에 미국 국내총생산(GDP) 성장의 3분의1과 고용증가의 절반은 부동산 부문에서 비롯됐다. 부동산시장 거품이 터지자, 소비와 투자가 줄어들고 경제가 곤두박질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정성진 이번 위기를 겪으면서 지난 30년간 위세를 떨쳤던 신자유주의 시대가 저물고 케인스주의 혹은 국가주의가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등장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때마침 오바마 정부의 등장과 함께 이런 움직임에도 탄력이 붙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현재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특정한 형태의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이므로 단지 케인스주의나 국가주도형 발전전략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워 보인다. 당신이 지금까지 들려준 얘기도 이런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브레너 오늘날 각국 정부는 일단 케인스주의, 그리고 국가를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위기에서 탈출하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시장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시장방임주의는 현재와 같은 경제 재앙을 막거나 대처하는 데 무능한 것으로 이미 판명났다. 하지만 케인스주의의 의미를 대규모 재정적자 정책, 그리고 총수요를 부양하기 위한 신용완화 정책 정도로 이해한다면, 과연 이런 정책들로 기대하는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짧게는 지난 7년 동안 부동산시장 거품을 조장한 연준의 정책, 그리고 부시 정부의 적자재정 정책 덕분에, 우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케인스주의적 경기부양책을 이미 경험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땠나? 바로 가장 미약한 수준의 경기순환 주기였을 뿐이다. 현재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다. 부동산시장의 거품이 꺼지고 대출 길이 막히면서 가계와 기업은 소비와 투자를 줄이고 있다. 기업의 이윤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기업 역시 임금을 삭감하고 일자리를 빠른 속도로 줄이고 있다. 총수요 감소와 이윤율 저하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경제가 한창 확장하던 시기에도 케인스주의가 경제를 안정적으로 끌고가는 데 실패한 마당에, 1930년대 이후 최악의 불황 상황인 지금 우리가 케인스주의로부터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오바마, 노동자 이익위한
결정적인 행동 취하려면
노동대중 조직화 필수적 정성진 오바마는 강력한 경제살리기에 나설 태세인데. 브레너 오바마 정부는 경제에 어떤 의미있는 자극을 주기 위해 결국 국가자본주의 형태의 대규모 직·간접 투자에 나설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엄청난 정치적·경제적 장애물을 넘어서야 한다. 미국의 정치문화는 정부지출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편이다. 또 정부지출과 국가부채가 대규모로 늘어난다면, 당연히 달러의 가치가 위협받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동아시아 나라의 정부들이 기꺼이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수지 적자를 메꾸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제공해줬다. 미국의 소비수준 유지가 자국의 대미 수출에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중국마저 경제위기의 영향권 아래 들어서고 있지 않나. 동아시아 나라 정부들이 미국의 적자를 메꿔주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 규모가 지금보다 몇 배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달러 투매라는 공포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지 않을까. 정성진 이제 오바마 시대가 공식적으로 열렸다. 오바마는 ‘21세기의 루즈벨트’를 자처하며 ‘새로운 뉴딜’을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오바마 정부에 대해선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 궁금하다. 브레너 오바마의 집권은 당연히 환영할 일이다. 만일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가 당선되었더라면 미국 정치에서 가장 반동적인 세력에게 엄청난 힘을 실어주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또 부시 정부가 보여준 극단적인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뿐 아니라, 노동조합과 복지국가, 환경보호 정책의 마지막 흔적까지 없애려는 이들의 의도를 승인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길 수 없는 건 오바마 역시 루스벨트와 마찬가지로 민주당 중도파라는 점이다. 따라서 오바마는 혼자서는 노동 대중 다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오늘날 대다수 노동대중은 쪼그라든 이윤을 일자리 감축과 임금 삭감 등을 통해 벌충하려는 기업들로부터 강력한 공격을 받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오바마는 미국 역사상 ‘납세자에 대한 최대 규모의 약탈’이라고 불리는 금융구제안을 지지했다. 오바마는 또 자동차산업 구제금융 법안도 지지했다. 이 구제금융안이 자동차산업 노동자 임금을 대폭 삭감하는 것을 조건으로 했는데도 말이다. 분명한 것은 루스벨트와 마찬가지로, 오바마는 노동대중이 ‘아래로부터’ 조직화된 직접 행동을 통해 압력을 행사할 경우에만 노동대중의 이익을 지키기위한 결정적인 행동에 나설 것이란 사실이다. 루스벨트가 그러지 않았나. 실제로 루즈벨트 정부는 대중 파업의 거대한 물결 속에 압박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등을 강화하는 1933년의 와그너법을 비롯해 사회보장제도 등 진보적인 색채의 각종 뉴딜 법안을 통과시켰다. 오바마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되풀이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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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너 교수의 이론은 브레너 교수의 주장은, 1970년대 이후 세계시장에서 제조업 부문간 경쟁이 심해지면서 과잉설비와 과잉생산이 누적돼 자본이 거둘 수 있는 이윤율이 장기적으로 떨어졌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임금 상승에 따른 이윤 압박 등으로 설명해왔던 기존 좌파 경제학의 통설을 뒤집은 것이다. 세계경제가 활력을 잃은 것은 한마디로 각국의 자본이 벌이는 무한경쟁에 따른 필연적 결과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1998년 펴낸 <혼돈의 기원>에서 “어떠한 실질임금의 성장도 표용할 수 없는 자본의 무능력”이 경제 위기의 실제 원인임을 꼬집었다. 이런 주장을 두고 좌파 경제학자들은 물론 역사학계 전반에서 엄청난 논쟁이 벌어졌다. ‘제조업 이윤율 저하’ 위기 근본
‘임금상승이 문제’ 통념 뒤집어 세계경제가 위기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면서, 그의 분석과 이론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진보학술지인 <신좌파평론>은 지난해 11·12월호에서 브레너의 2006년 역작 <전지구적 혼돈의 경제학>을 토대로 3명의 학자들로부터 제기된 비판을 특집호로 꾸몄다. 유례없는 경제위기의 한가운데서 ‘3차 브레너 논쟁’의 싹이 움트고 있는 셈이다. 특히 3명의 비판가 가운데는 <한겨레>의 특별기획 - ‘대전환’의 시대, 세계 석학과의 대담 두 번째 주인공인 미셸 아글리에타 파리 10대학 교수도 포함돼 있다. 아글리에타 교수는 브레너 교수가 주장하는 제조업 부문 이윤율의 장기 하락은 미국의 경우에만 해당할 뿐, 유럽과 일본 자본주의에는 곧장 적용되기 힘들다는 내용의 비판 논문을 실었다. 브레너 교수는 <한겨레>와 이번 대담에서 자신에게 제기된 다양한 비판에 대해 열띤 반론을 펴기도 했다. 하지만 브레너 교수가 그 내용이 곧 출간될 <신좌파평론> 3·4월호에 담길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간곡하게 비공개를 요청한 터라, 지면에는 아쉽게도 담지 못했다. 다만, 브레너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회복과정과 중국 경제의 성장이 세계경제에 더욱 깊숙하게 통합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강조하면서, 전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심화할수록 한국과 중국은 심각한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마지막으로 브레너 교수는 한국의 진보진영에게 요즘 유행하는 케인스주의적 정책 대안을 모색하기보다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조직을 건설하는 데 더욱 힘써야 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최우성 기자 [전문 보기 / 영문으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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