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 철거민 참사 현장 들머리에 마련된 임시분향소에서 21일 오후 용산 재개발지역 주민들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철거당한 뒤 철거민 돕던 남편이…
식당 지키려던 요리사 아버지가…
식당 지키려던 요리사 아버지가…
권명숙(47)씨의 눈에는 아직도 먼 발치에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남편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지난 19일 권씨는 이날부터 건물 점거 투쟁에 나선 남편 이성수(50)씨를 만나러 경기도 용인에서 용산을 찾아왔다. 남편이 올라간 건물은 이미 새카맣게 경찰이 에워싼 상태였고, 겨우 얼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먼 거리에서 부부는 눈인사를 나눴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참사가 일어났던 20일 권씨는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전쟁같은 하루를 보냈다. 사고 소식이 전해진 직후 화재 현장에 올라가 남편을 찾으려던 권씨는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다 실신했다. 병원에 실려가 저녁이 돼서야 깨어났지만, 권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새카맣게 탄 사람 중 하나가 남편’이라는 소식 뿐이었다.
21일 새벽 순천향병원 영결식장에서 만난 권씨는 “처자식 생각해서 몸조심 하라고 하니 ‘알겠다 조심하겠다’던 양반이 …”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이들 부부가 전국철거민연합(전철련) 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난해 5월부터다. 경기도 용인 수지구 신봉동에서 두 아들과 살던 부부는 당시 대규모 아파트단지 조성을 위한 철거가 진행되면서 집을 나와 천막 생활을 시작했다. “4년 전 운영하던 가구공장의 화재로 거리에서 뻥튀기 장사로 생계를 꾸려왔다”는 권씨는 “그래도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할만큼 어렵진 않았다”고 했다. 강제 집행으로 권씨네 집이 헐리면서 네 가족의 삶은 무너졌다. 권씨는 “2008년 5월9일 우리집이 철거되던 날 가족들은 몸만 챙겨 나오기 바빴고, 고등학교 2학년인 둘째 아들은 교복도 챙겨나오지 못해 두 달 동안 사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다”고 말했다.
천막 생활은 처참했다. 권씨는 “물과 전기도 없었고, 동사무소에서 주는 쌀과 생필품으로 근근이 살았다”고 했다. 교복 없이 학교에 다녀도 불만이 없던 둘째 아들도 “씻을 수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고 힘들어했다. 권씨는 “남편이 ‘나도 철거민인데 같은 철거민을 모른척 할 수 있냐’며 철거민 활동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유가족의 가슴은 주검을 찾는 과정에서 또한번 난도질을 당했다. 용산 4구역에 있던 자신의 가게가 철거돼 농성에 참여했다 숨진 양회성(56)씨의 큰 아들 양종원(30)씨는 20일 오후 경찰서에서 ‘주검을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고 경찰서로 향했으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부검하러 갔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주검이 국과수에서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병원을 찾아갔지만 경찰은 “훼손이 너무 심해서 보여줄 수 없다”며 막았다. 거세게 항의한 끝에 새벽 2시 반이 돼서야 새카맣게 탄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30년 요리사 경력의 아버지가 3년 전 빚을 내 용산에 100평 짜리 복집을 낸 게 불행의 화근이었다. 하루 매출이 100만원에 이를 정도로 장사가 잘 됐지만, 철거가 시작되면서 용역직원들이 행패를 부려 월 20만원까지 매출이 떨어졌다. 보상금은 5천만원이었지만, 4년 전 보증금 8천만원에 수리비 7천만원, 시설비 5천만원 등 2억원이 넘게 들어간 상황이었다. 아들 양씨는 “아버지가 살아온 터전을 지키기 위해 농성장에 올라간 것 같다”면서 “이 나라에 태어난 게 한스럽다”고 울먹였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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