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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현판 놓쳤을 땐 아이 떨어뜨린 심정”

등록 2008-12-25 15:18수정 2008-12-25 15:32

지난 2월 10일 숭례문 화재 현장에 출동해 현판을 떼어냈던 서울 중부소방서 박창기 반장이 23일 저녁 소방차에 오르며 그때를 떠올리고 있다. 아래 사진은 그날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불을 끄는 모습.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난 2월 10일 숭례문 화재 현장에 출동해 현판을 떼어냈던 서울 중부소방서 박창기 반장이 23일 저녁 소방차에 오르며 그때를 떠올리고 있다. 아래 사진은 그날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불을 끄는 모습.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삼중사중 지붕구조 앞에서 무력감
좌절감·비난 감당하기 힘든 나날
[2008 사건과 사람]
①숭례문 화재 진압 박창기 소방관

민족 최대 명절인 설 연휴 마지막 날, 온 국민은 불에 타들어가는 ‘국보 1호’를 생중계로 지켜봤다. 그때 현장에 있었던 서울 중부소방서 소방대원 박창기(38) 반장은 지금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박씨는 23일 <한겨레> 기자와 만나 “국보를 지키지 못했다는 좌절감과 쏟아진 비난을 동시에 감당하기 힘들었다”며 말을 꺼냈다. 박씨는 당시 숭례문 2층 누각에 불이 옮아 붙기 전, 사다리차를 타고 가까스로 현판을 떼어 낸 소방관이다.

처음 출동할 때만 해도 큰불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밤 9시께 막상 현장에 도착해보니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동료 10여명과 함께 숭례문 안으로 들어갔을 땐, 이미 짙은 연기로 한 치 앞도 보기 힘들었다.

발화점을 찾기 위해 사다리를 대고 동력톱과 도끼로 내부 천장을 뚫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물을 잔뜩 먹은 수십㎝ 두께의 나무를 뚫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당시 소방대원들이 바깥쪽 지붕에 물만 뿌렸다는 얘기는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밤 11시가 조금 넘었을까. 내부 진화를 포기하고 바깥 지붕을 뚫기 시작했다. 동료들과 함께 숭례문 정면 쪽에서 사다리차에 타고 지붕에 접근한 뒤 파괴작업용 큰 망치(TNT)로 기와를 내리쳤다. 하지만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기와가 세 겹이더군요. 얼어붙은 기와는 망치로 깼지만 기와와 나무 사이에 있는 시멘트 같은 강석회는 망치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그는 삼중 사중으로 된 지붕 구조 앞에서 초조감을 넘어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다. 초기 진화에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는 “현장에서도 철퇴형 철거기구와 굴착기 등을 동원해 지붕을 부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진화에 성공하더라도 국보가 만신창이가 될 것에 대한 책임 때문에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보이지 않던 불’은 자정을 지나 누각 전체를 감쌌고, 새벽 1시54분 숭례문은 무너져내렸다.

박씨가 숭례문 현판을 ‘구조’한 건 지붕 파괴 작업 전이었다. “기와와 서까래 사이에서 새어나오는 불길을 확인하고 굴절차로 접근하는데 현판이 눈에 띄었어요. 언제 불길이 미칠지 모르는 곳이어서 먼저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는 동료인 박성교(35) 대원과 함께 굴절차를 타고 현판 쪽으로 최대한 다가갔다. 한쪽 고정쇠를 빼고 다른 쪽을 빼려는 순간 육중한 현판이 무게 균형을 잃고 떨어졌다. 눈앞이 깜깜했다. 그는 “8년 전 현장에 갓 투입됐을 때 고층에서 피신하던 한 여성의 등에 업힌 아이가 추락하는 것을 봤다. 떨어진 현판을 봤을 때 딱 그 심정이었다”고 말했다.

서운함도 털어놨다. “방송에서 전문가들이 나와 ‘왜 이런 (화재 진압) 시도를 안 했냐’고 질책할 땐 정말 속상했어요. 현장에선 최선을 다했는데….” ‘현판을 왜 내동댕이쳤느냐’고 추궁하는 인터넷 댓글도 오랫동안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박씨와 동료 대원들은 누구도 먼저 ‘숭례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소방대원으로서 숭례문을 지키지 못한 자괴감을 누구보다 서로가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은 화재 출동 때 가끔씩 담장 안으로 숭례문을 훔쳐볼 뿐이지만, 언젠간 복원된 숭례문 앞에서 아이들과 기념사진을 찍을 날이 오겠죠.”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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