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시사다큐 ‘한큐’]③ 자기땅을 ‘사격’당한 사람들 <2부>
임시거처에 공공근로로 생계, 그나마 곧 ‘끝’
가을걷이 들녘 보며 “가슴이 저리고 미어져”
임시거처에 공공근로로 생계, 그나마 곧 ‘끝’
가을걷이 들녘 보며 “가슴이 저리고 미어져”
한겨레 시사다큐 <한큐>가 ‘큐!’했습니다.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뉴스의 현장과 진솔한 삶의 현장으로 카메라가 출동합니다. ‘사회와 사람’이 묻어나는 영상으로 우리들의 ‘오늘’을 요모조모, 촘촘하게 비춰드리겠습니다. <한큐>는 매주 화요일 10시 <인터넷한겨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한큐> ③ 자기땅을 ‘사격’당한 사람들 <2부>
[%%TAGSTORY1%%]
‘주한미군 기지 사업지역으로 무단 출입시 국유재산법에 의거 2년 이하, 7백만원 이하의 처벌을 받게 된다.’
평택 대추리 주민 이태헌(64)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군기지 공사가 한창인 황새울 들녘에는 무릎까지 올라올 정도로 막 자란 잡초만이 무성했다. 높이 2.5m의 철조망은 아무나 이 땅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철조망에는 무단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나비와 잠자리만이 철조망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이씨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백만 평이 넘는 땅을 이렇게 놀리는 게 말이 돼?” 대추리는 그렇게 쓸쓸한 모습으로 옛 주인을 맞고 있었다.
평택에 들어설 주한미군 기지 공사가 시작된 지 1년을 맞고 있다. 이전 공사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군인과 경찰, 용역 직원까지 동원해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와 도두리 220여가구 주민들을 고향에서 몰아내고서야 공사가 시작됐다. 국가의 강제 이주정책에 맞서 싸웠던 지역 주민들은 지금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대추리에서 살던 42가구 100여 명의 주민들은 대추리에서 3km 정도 떨어진 송화3리에 모여 살고 있다. 정부가 대추리 주민들의 이주단지를 완공하기 전 임시로 살 거처를 이곳에 마련해 주었다.
고향을 빼앗긴 농민들, 그들은 추수철을 어떤 심정으로 보내고 있을까?
‘대추리’ 마을 문패는 그대로인데… 지난 20일 찾은 송화3리 포유빌라 입구엔 ‘대추리’라고 쓰인 목판이 걸려있었다. 이주한 대추리 사람들은 여전히 송화3리가 아닌 ‘대추리’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3층짜리 포유빌라 105동 1층 마을회관 앞에는 이주 당시 주민들이 가지고 나온 농기계와 비료 등이 먼지가 쌓인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게 됐지만 주민들은 차마 농기계를 버릴 수 없었다. 트랙터 옆에 강연서(65)씨가 비닐 멍석을 깔고 근처 텃밭에서 일군 팥을 털고 있었다. 강씨뿐 아니라 많은 주민은 송화3리 주민들의 허락을 받고 근처 텃밭에서 고추, 깨 등의 농작물을 가꾸고 있었다. 최아무개(71)씨는 팽성초등학교 근처 4평짜리 밭에 물을 주러 가던 중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 모습을 보면 가슴이 저리고 미어져. 예전에 나도 저러고 살았는데, 지금은 (풋고추 따위 심고) 이러고 해놓고 살지 뭐야.” 최씨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벅터벅 텃밭으로 걸어갔다.
일부는 충남 서산에 땅 사 2시간 거리 ‘출퇴근 농사’
마을 사람들은 농사 대신 평택시가 알선한 공공근로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몇 년을 일궈온 농토가 국가에 강제수용됐으니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한 달 월급은 80만 원이었다. 오전 9시가 되니 마을회관 앞으로 22명의 주민이 모였다. 마을 반장 이태헌(63)씨가 주민들에게 오늘 할 일을 퉁명스럽게 설명했다. “도로 옆에 유채꽃씨를 뿌리면 돼요.” 누군가 물었다. “비료는 안 뿌리나?” “그냥 뿌려요.”
주민들은 차가 왔다갔다하는 2차선 도로 한쪽에 주저앉아 호미로 땅을 파고 유채꽃씨를 뿌렸다. ‘탁탁’ 호미에 돌부리 걸리는 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한 주민이 “일 같지도 않은 일을 시키니 힘이 안 난다”며 투덜댔다. 이수걸(72)씨도 거들었다. “농사짓던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내가 뭔 짓을 하는 건지, 원….” 이들의 대화 모습을 반장 이씨가 묵묵히 바라봤다. 마을 사람들의 불평에 책임자인 그가 할 말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일 같지 않은’공공근로도 “다음달이면 끝”이라고 주민들은 아쉬워했다. 평택시가 공공근로 자격 요건을 대폭 강화하기로 했기 때문이란다. 평택시청 한미협력과 관계자는 “2003년에서 2005년까지 재산세 3만 원 미만 납세자이면서 만 65세에서 75세 고령자에게만 일자리를 제공하도록 방침을 바꾸었다”고 밝혔다. 일부 대추리 이주민들은 한 달 80만원짜리 공공근로 일자리마저 잃어버릴 처지에 놓인 것이다. 강연서씨는 “내년부터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요즘은 신경이 예민해져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생계가 막막해진 일부 대추리 농민들은 충남 서산시에 땅을 사 그곳으로 출퇴근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 수도권을 벗어나 차로 2시간 걸리는 곳까지 가야만 수지가 맞는, 농사 지을 땅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상금은 5천만원인데 이주단지 입주비는 2억 여원
“30년 동안 대추리에서 살면서 정들었던 마을 사람들과 헤어지기 싫다. 전세로라도 들어가게 해준다면 좋을 텐데…”
어렵게 송화리에 정착한 주민들은 이주단지로 또다시 이사를 해야 한다. 평택시는 팽성읍 노와리에 8만 2500㎡ 규모로 ‘대추리 이주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주민들이 이주단지에 입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노아무개(70)씨는 벌써 걱정이 태산이다. 노씨는 대추리에 17평 집을 가진 것이 전부여서 강제 이주 당시 정부로부터 5천만 원의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돈으로 이주단지로 이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평택시는 ‘대추리 이주단지’ 입주 비용을 2억 원에서 2억5천만 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다른 주민들이라고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보상협상 당시 토지 3.3㎡당 15만 원 정도를 받았다. 국방부는 대추리 주민 가운데 8가구 정도가 이주단지 입주 능력이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평택시 주민지원과 관계자는 “한 가구당 990㎡(집터 660㎡, 텃밭 330㎡)의 토지가 분양된다. 이주단지의 평당 추정 분양가가 40만 원 정도로 부지 구입비용으로 1억 원~1억 5천만 원 정도 들고, 개별적으로 집을 짓는데 추가로 1억 원이 더 들어간다”며 “전세 대책과 대출금 지원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점심을 먹다 숟가락을 내려놓는 송재국(70)씨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송씨뿐이 아니다. 함께 점심을 먹으려고 마을회관에 모인 주민들의 표정이 비슷했다. 미군이 국방부에 ‘2019년까지 기지이전 연기요청’을 했다는 뉴스가 알려진 뒤였다. 미군은 예산 문제를 들어 국방부에 연기를 통보했으나 기지 이전사업으로 고향에서 내쫓긴 사람들은 분통이 터졌다.
그러나 주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에 대해서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리 얘기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냉소가 주민들 가슴 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수걸(72)씨는 “기자들에게 다 얘기해줘도 보도가 안 돼. 결국 우린 이렇게 쫓겨났잖아”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옆에 있던 송씨가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왔다 가면 옛날 생각이나 우린 잠을 못 자. 이해해줘.” 주민들의 가슴 속 상처가 생각보다 깊어 보였다. 주민들은 앞으로 10년을 더 무성한 잡초 속에 방치된 자신들의 논을 지켜보면서 타들어가는 속을 달래야 할지 모른다.
“다 거짓말, 안 나가는 게 살 길이야”
점심을 먹고 각자의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 마을회관에 뜻밖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고덕 신도시 개발계획’에 따라 대추리 주민들처럼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할 평택시 고덕면 해창리 주민들이 대추리 주민들을 만나러 온 것이다. 마을회관 앞에서 팥을 털고 있던 김연서씨와 해창리 주민들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파트 준다, 상가 준다, 그러면서 설득하지요?”
“맞아요”
“그것 다 거짓말이에요. 안 나가는 게 살 길이에요. 꼭 이기셔야 해요.”
해창리 주민들에겐 대추리 주민들의 현재 모습이 그들의 미래 모습이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이 이곳을 찾아온 이유였다. 대추리 주민들에게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근덕(44) 해창 3·4리 이장은 “주민들이 대추리처럼 강제로 쫓겨날까 봐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창리 주민들은 30여 분간 대추리 주민들과 얘기를 나눈 뒤 돌아갔다.
김씨는 해창리 주민들이 떠난 뒤 오현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오현리 주민들도 끝까지 싸워야 해. 돈 몇 푼 받고 내쫓기면 생계가 막막해져.” 국방부의 파주시 무건리 훈련장 확장 계획에 따라 쫓겨날 처지에 놓인 오현리 주민들의 소식을 김씨는 잘 알고 있었다. 대추리 주민들은 국책사업에 밀려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일을 남 일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팥을 터는 김씨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영원히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어둠이 깔릴 즈음, 방승률(74)씨의 집을 찾았다.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인 방씨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추 분교가 강제로 철거될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2천 명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거야. 주민은 300명밖에 없는데. 겁이 나도 어떡해. 악에 받히니까 이 학교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밖에 안나.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어.” 김씨는 대추 분교로 시커멓게 몰려들어 오던 전경들의 모습과 학교 안에서 곡소리처럼 새어나오던 울음소리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과거에 대한 회상은 고향을 잃어버린 처지에 대한 한탄으로 이어졌다. “고향을 잃는다는 게 얼마나 서글픈 지 알아?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통일이 되면 찾아갈 고향이라도 있지. 우린 영원히 고향을 잃어버렸어.” 12대째 대추리에서 살았던 방씨는 그렇게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우두두두둥.” 방씨와 이야기를 마칠 무렵, 바깥에서 미군 헬기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미군 기지 이전 공사가 시작되면서 농부들의 잃어버린 마을은 서서히 미군의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을회관 벽에 걸려있는 ‘대추리 이주단지 조감도’가 헬기의 굉음에 떨고 있었다. 연출·영상 김도성 피디 kdspd@hani.co.kr 글 허재현 기자catalunia@hani.co.kr
대추리 지역으로의 출입을 금하는 국방부의 경고문. 대추리는 미군기지가 이전해 올 예정이어서 현재 터닦기 공사가 한창이다. 사진 김도성 피디
‘대추리’ 마을 문패는 그대로인데… 지난 20일 찾은 송화3리 포유빌라 입구엔 ‘대추리’라고 쓰인 목판이 걸려있었다. 이주한 대추리 사람들은 여전히 송화3리가 아닌 ‘대추리’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3층짜리 포유빌라 105동 1층 마을회관 앞에는 이주 당시 주민들이 가지고 나온 농기계와 비료 등이 먼지가 쌓인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게 됐지만 주민들은 차마 농기계를 버릴 수 없었다. 트랙터 옆에 강연서(65)씨가 비닐 멍석을 깔고 근처 텃밭에서 일군 팥을 털고 있었다. 강씨뿐 아니라 많은 주민은 송화3리 주민들의 허락을 받고 근처 텃밭에서 고추, 깨 등의 농작물을 가꾸고 있었다. 최아무개(71)씨는 팽성초등학교 근처 4평짜리 밭에 물을 주러 가던 중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 모습을 보면 가슴이 저리고 미어져. 예전에 나도 저러고 살았는데, 지금은 (풋고추 따위 심고) 이러고 해놓고 살지 뭐야.” 최씨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벅터벅 텃밭으로 걸어갔다.
송화3리에 마련된 대추리 주민 임시 거주단지. 마을 입구엔, ‘대추리’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있다. 사진 김도성 피디
농사꾼이었던 대추리 주민들은 현재 공공근로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 날은 길가에 유채꽃씨를 뿌리는 일을 배당받았다. 사진 김도성 피디
허허벌판으로 변한 대추리의 모습. 주민들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쳐놓은 철조망이 녹이 슨 채 방치돼 있다. 사진 김도성 피디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