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76·사진)
‘우리시대 마지막 재야’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고문 후유증·지병에도 결기 또렷
“통일은 살아서 이뤄내야 할 목숨”
‘길을 찾아서’ 연재 삶줄기 첫정리 “식사가 뭬야? 밥이야. 아니면 진지라고 해야 해!” ‘우리 시대 마지막 재야’를 자처하는 백기완(76·사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댓거리’를 할라치면 누구나 먼저 거쳐야 하는 문이 있다. 바로 우리말 쓰기다. 지난 5월15일부터 <한겨레> 창간 20돌 기념 기획으로 시작한 ‘길을 찾아서’의 세번째 판을 맡기로 한 날에도 그렇게 말길을 텄다. 처음 글을 부탁했을 때 ‘요즘 세상에 누가 나 같은 늙은이 넋두리를 알아나 듣겠냐’며 한사코 손사래를 친 끝에 마주앉은 자리였다. “이태껏 자랄 때 기억을 쓴 글이나 책이 적지 않지만, 내 살아온 얘기를 한 흘떼(흐르는 강)로, 구체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이번이 첨일 거야.” 그 말마따나, 1971년 <항일민족론>(사상사)을 시작으로 10여권의 저서와 여러 권의 시집에서 그는 자전적 이야기들을 드문드문 들려줬다. 가장 최근작인 2005년 <부심이의 엄마 생각>(노나메기)에서는 북녘에 두고 온 어머니에게 보내는 43통의 편지 형식으로 자신의 성장기를 회상하기도 했다. 어렵사리 온전히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는 글쓰기를 작정한 그 속내가 궁금했다. “내 살아온 꼴은 한마디로 땅불쑥해. 땅이 평평하지 않고 툭툭 튀어나온 꼴이니, 특이하다 말이지. 그 큰 줄기를 뽑아보니 통일 싸움꾼이 하나요, 이야기꾼이 둘이야. 그래서 그 특이한 내력을 남겨볼라 그래!” 1933년 황해도 은율, 구월산 아래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마친 뒤 13살 때인 46년 아버지·형과 함께 서울로 내려온 그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고, 교복을 입고 싶었지만” 끝내 중학교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일찍이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할아버지의 기개와 독립군 이야기들을 통해 민족의식에 눈뜬 그는 백범 김구 선생의 가르침, 장준하 선생과 문익환 목사와의 ‘끈메’(인연) 등으로 분단 이후 내내 통일운동에 몸바쳐 왔다. 73년 유신헌법 폐지 청원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른 것을 시작으로 박정희 군부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에도 앞장섰다. 87년과 92년 대선 때 ‘민중후보’로 추대받아 김대중-김영삼 후보 단일화와 진보진영의 정치 세력화에도 애썼다.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67년 세운 백범사상연구소의 맥을 이은 통일문제연구소를 꾸리며 계절마다 글모음집 <노나메기>를 펴내고 있다.
“요새야 통일이란 말이 유행을 지나 한물간 지경이지만, 백범 선생이 비명에 가신 이후로 ‘통’자도 함부로 내뱉지 못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나만 잘나서 통일, 통일 노래한다는 게 아냐. 통일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이뤄야 할 ‘목숨’ 같은 거야.” 차마 말로 묘사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다는 어린 시절부터 피난살이 설움을 더해준 ‘배곯이’, 반세기 반독재 통일운동 싸움판에서 달고 살아온 ‘매질’(고문)의 후유증에 지병인 소갈(당뇨)까지 겹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그만의 결기와 신명은 여전하다. “내 지난날 떠올리며 한 꼭지 한 꼭지 쓸 때마다 눈물이 한 바가지야. 왜 그리 눈물이 많냐고? 한이 맺혀서, 울분이 쌓여서 그래. 내 어릴 적 덧이름(별명)이 부심이 말고도 여럿인데, 울보라고들 했어.” 그렇지만, 전혀 부끄럽지는 않다는 그는 그 뚝심이 모두 할머니와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솟는다고 했다. “장산곶매 이야기도 그렇고 이심이 이야기도 그렇고, 힘없는 무지랭이 민중들이 쓰러지고 엎어지고 또 꼬꾸라져도 끝내는 ‘불방망이’로 되살아나 판을 뒤집는 거거든. 내가 한글학자들도 잘 모르는 우리말을 어케 배웠겠어. 그 이야기 속에 다 있거든. 이런 말 나 말고 누가 알켜주갔어?” 그 대목에서 다시금 떠오른 어머니 생각에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한자락을 불러 제끼는 그의 눈에 금세 물이 고인다. “제목? 나의 한살매(한평생)가 좋갔어.” 마땅한 제목을 지어달라는 요청에 선뜻 ‘우리말’ 한마디를 뽑아주는 그에게 무심코 인사를 했다가 기어코 한소리를 또 탓다. “감사합니다? 아니야, 고맙습니다 해야지!”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통일은 살아서 이뤄내야 할 목숨”
‘길을 찾아서’ 연재 삶줄기 첫정리 “식사가 뭬야? 밥이야. 아니면 진지라고 해야 해!” ‘우리 시대 마지막 재야’를 자처하는 백기완(76·사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댓거리’를 할라치면 누구나 먼저 거쳐야 하는 문이 있다. 바로 우리말 쓰기다. 지난 5월15일부터 <한겨레> 창간 20돌 기념 기획으로 시작한 ‘길을 찾아서’의 세번째 판을 맡기로 한 날에도 그렇게 말길을 텄다. 처음 글을 부탁했을 때 ‘요즘 세상에 누가 나 같은 늙은이 넋두리를 알아나 듣겠냐’며 한사코 손사래를 친 끝에 마주앉은 자리였다. “이태껏 자랄 때 기억을 쓴 글이나 책이 적지 않지만, 내 살아온 얘기를 한 흘떼(흐르는 강)로, 구체적으로 정리하는 것은 이번이 첨일 거야.” 그 말마따나, 1971년 <항일민족론>(사상사)을 시작으로 10여권의 저서와 여러 권의 시집에서 그는 자전적 이야기들을 드문드문 들려줬다. 가장 최근작인 2005년 <부심이의 엄마 생각>(노나메기)에서는 북녘에 두고 온 어머니에게 보내는 43통의 편지 형식으로 자신의 성장기를 회상하기도 했다. 어렵사리 온전히 자신의 삶을 되짚어보는 글쓰기를 작정한 그 속내가 궁금했다. “내 살아온 꼴은 한마디로 땅불쑥해. 땅이 평평하지 않고 툭툭 튀어나온 꼴이니, 특이하다 말이지. 그 큰 줄기를 뽑아보니 통일 싸움꾼이 하나요, 이야기꾼이 둘이야. 그래서 그 특이한 내력을 남겨볼라 그래!” 1933년 황해도 은율, 구월산 아래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마친 뒤 13살 때인 46년 아버지·형과 함께 서울로 내려온 그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고, 교복을 입고 싶었지만” 끝내 중학교 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일찍이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할아버지의 기개와 독립군 이야기들을 통해 민족의식에 눈뜬 그는 백범 김구 선생의 가르침, 장준하 선생과 문익환 목사와의 ‘끈메’(인연) 등으로 분단 이후 내내 통일운동에 몸바쳐 왔다. 73년 유신헌법 폐지 청원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른 것을 시작으로 박정희 군부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에도 앞장섰다. 87년과 92년 대선 때 ‘민중후보’로 추대받아 김대중-김영삼 후보 단일화와 진보진영의 정치 세력화에도 애썼다.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67년 세운 백범사상연구소의 맥을 이은 통일문제연구소를 꾸리며 계절마다 글모음집 <노나메기>를 펴내고 있다.
“요새야 통일이란 말이 유행을 지나 한물간 지경이지만, 백범 선생이 비명에 가신 이후로 ‘통’자도 함부로 내뱉지 못하지 않았어? 그렇다고 나만 잘나서 통일, 통일 노래한다는 게 아냐. 통일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이뤄야 할 ‘목숨’ 같은 거야.” 차마 말로 묘사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다는 어린 시절부터 피난살이 설움을 더해준 ‘배곯이’, 반세기 반독재 통일운동 싸움판에서 달고 살아온 ‘매질’(고문)의 후유증에 지병인 소갈(당뇨)까지 겹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그만의 결기와 신명은 여전하다. “내 지난날 떠올리며 한 꼭지 한 꼭지 쓸 때마다 눈물이 한 바가지야. 왜 그리 눈물이 많냐고? 한이 맺혀서, 울분이 쌓여서 그래. 내 어릴 적 덧이름(별명)이 부심이 말고도 여럿인데, 울보라고들 했어.” 그렇지만, 전혀 부끄럽지는 않다는 그는 그 뚝심이 모두 할머니와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솟는다고 했다. “장산곶매 이야기도 그렇고 이심이 이야기도 그렇고, 힘없는 무지랭이 민중들이 쓰러지고 엎어지고 또 꼬꾸라져도 끝내는 ‘불방망이’로 되살아나 판을 뒤집는 거거든. 내가 한글학자들도 잘 모르는 우리말을 어케 배웠겠어. 그 이야기 속에 다 있거든. 이런 말 나 말고 누가 알켜주갔어?” 그 대목에서 다시금 떠오른 어머니 생각에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한자락을 불러 제끼는 그의 눈에 금세 물이 고인다. “제목? 나의 한살매(한평생)가 좋갔어.” 마땅한 제목을 지어달라는 요청에 선뜻 ‘우리말’ 한마디를 뽑아주는 그에게 무심코 인사를 했다가 기어코 한소리를 또 탓다. “감사합니다? 아니야, 고맙습니다 해야지!”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