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놀이 30돌’ 일본공연 마친 김덕수 교수
도쿄·오사카 등서 순회…기모노 입고 어깨춤도
“세계적 한류 음악인데 국내 전용무대도 없어
베이징올림픽 남북공연단 합의 꼭 이행됐으면” 정식 공연이 끝난 뒤에도 1500석을 가득 메운 객석에서는 박수소리가 끊어질 줄 몰랐다. 50대 중반을 넘긴 중년의 예인 4명이 18년 만에 다시 뭉쳐 2시간 가까이 들려준 원조 한류의 신명난 리듬과 울림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 재일동포는 물론이고 객석을 메운 상당수 일본인들도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결국 뒤풀이 마당이 펼쳐졌다. 공연자가 무대로 되돌아와 연주를 시작하자 관객들은 신명에 못이겨 하나 둘 무대에 올라가 강강수월래 무리를 지어 어깨춤을 추었다.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의 서툰 어깨짓도 눈에 띄었다. 4일 밤 일본 도쿄 한 호텔 공연장에서 열린 사물놀이 탄생 30돌 기념 일본순회 공연의 마지막 무대는 언제나처럼 공연자와 관객의 경계를 넘은 어울림 속에서 막을 내렸다. 사물놀이를 처음 보았다는 사쿠라이 나오코는 “공연 내내 공연자들이 보여주는 역동적인 소리의 울림에 깜짝 놀랐다”며 “앉은 채 상반신만으로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놀라웠고, 사물의 리듬감도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김덕수(장고·56) 이광수(꽹과리·56) 최종실(북·55) 남기문(50·징, 자살한 김용배 대신 들어옴) 등 사물놀이 예인 4명은 지난달 25일 아카타 공연을 시작으로 오사카, 나고야, 도쿄 등 일본 5개 도시를 순회공연했다. 4일 공연 전에 만난 김덕수 한국예술종합학교(전통연희과) 교수는 무대 밖에서도 한국 전통음악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들려주었다. “1982년 첫 일본 공연 당시 사물놀이 강습을 받은 8살짜리 꼬마를 오사카 공연에서 다시 만났어요. 서른 살이 넘은 그 친구는 우리를 보더니 눈물을 펑펑 흘리더군요. 일본에서 증손자뻘 제자까지 생겨나 1천개 이상의 사물놀이패가 있습니다.” 실제로 와세다 대학 사물놀이패 학생들은 사물놀이라는 음악 양식을 만든 원년 멤버들의 역사적 공연을 눈앞에서 목격하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 밖에서는 사물놀이가 세계적인 한류 음악으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 아직도 전용무대조차 없는 게 현실”이라며 아쉬워했다. “아직도 저속하다는 뜻에서 민속음악이라는, `속’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또한 우리의 가무악은 `농현’(흔드는 음)의 예술인데 서양음악에 튜닝시키는 바람에 우리 국악관현악단의 소리를 망쳐버렸어요.” 그는 “우리는 자메이카는 몰라도 레게는 알듯이, 레게를 통해서 어느덧 자메아카를 사랑하게 된다”며 리듬의 세계성과 위대성을 이야기했다.
그는 9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석한 이후 사물놀이야말로 남과 북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통합과 통일의 음악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평양에 도착하니까 북한에서 사물을 치고 환영을 해줘 우리도 사물을 치면서 행사장인 김일성경기장까지 같이 갔어요. 남과 북이 다 바뀌었어도 가락의 신명만은 바뀔 수 없구나 느꼈죠. 언젠가 통일이 됐을 때 지구촌 전체에서 같이 울려펴질 수 있는 것은 꽹과리와 징·북·장고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제에서 해방될 때도 숨겨놓았던 꽹과리·징·장고를 들고 나왔잖아요.” 그는 성사 직전에 두번이나 무산된 `남북하나로공연단’에 얽힌 비화도 털어놓았다. “98년 두번째 평양공연 때 남북 단일 공연단을 만들자고 북한당국에 제안해 2002년 월드컵 때 같이하기로 했으나 연평해전이 발생하는 바람에 무산됐어요.” “또한 지난해 11월 김정일 위원장의 측근인 김양건 북한통일전선부장이 남쪽을 비공식 방문했을 때도 만나서 구두합의했어요. 베이징 올림픽 때 남북 하나로예술단을 만들어서 공연하고 연습도 개성공단에서 하기로 했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 악화로 아직 실현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이뤄지리라 믿습니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세계적 한류 음악인데 국내 전용무대도 없어
베이징올림픽 남북공연단 합의 꼭 이행됐으면” 정식 공연이 끝난 뒤에도 1500석을 가득 메운 객석에서는 박수소리가 끊어질 줄 몰랐다. 50대 중반을 넘긴 중년의 예인 4명이 18년 만에 다시 뭉쳐 2시간 가까이 들려준 원조 한류의 신명난 리듬과 울림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 재일동포는 물론이고 객석을 메운 상당수 일본인들도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결국 뒤풀이 마당이 펼쳐졌다. 공연자가 무대로 되돌아와 연주를 시작하자 관객들은 신명에 못이겨 하나 둘 무대에 올라가 강강수월래 무리를 지어 어깨춤을 추었다.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의 서툰 어깨짓도 눈에 띄었다. 4일 밤 일본 도쿄 한 호텔 공연장에서 열린 사물놀이 탄생 30돌 기념 일본순회 공연의 마지막 무대는 언제나처럼 공연자와 관객의 경계를 넘은 어울림 속에서 막을 내렸다. 사물놀이를 처음 보았다는 사쿠라이 나오코는 “공연 내내 공연자들이 보여주는 역동적인 소리의 울림에 깜짝 놀랐다”며 “앉은 채 상반신만으로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놀라웠고, 사물의 리듬감도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김덕수(장고·56) 이광수(꽹과리·56) 최종실(북·55) 남기문(50·징, 자살한 김용배 대신 들어옴) 등 사물놀이 예인 4명은 지난달 25일 아카타 공연을 시작으로 오사카, 나고야, 도쿄 등 일본 5개 도시를 순회공연했다. 4일 공연 전에 만난 김덕수 한국예술종합학교(전통연희과) 교수는 무대 밖에서도 한국 전통음악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들려주었다. “1982년 첫 일본 공연 당시 사물놀이 강습을 받은 8살짜리 꼬마를 오사카 공연에서 다시 만났어요. 서른 살이 넘은 그 친구는 우리를 보더니 눈물을 펑펑 흘리더군요. 일본에서 증손자뻘 제자까지 생겨나 1천개 이상의 사물놀이패가 있습니다.” 실제로 와세다 대학 사물놀이패 학생들은 사물놀이라는 음악 양식을 만든 원년 멤버들의 역사적 공연을 눈앞에서 목격하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 밖에서는 사물놀이가 세계적인 한류 음악으로 인정을 받고 있지만 아직도 전용무대조차 없는 게 현실”이라며 아쉬워했다. “아직도 저속하다는 뜻에서 민속음악이라는, `속’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또한 우리의 가무악은 `농현’(흔드는 음)의 예술인데 서양음악에 튜닝시키는 바람에 우리 국악관현악단의 소리를 망쳐버렸어요.” 그는 “우리는 자메이카는 몰라도 레게는 알듯이, 레게를 통해서 어느덧 자메아카를 사랑하게 된다”며 리듬의 세계성과 위대성을 이야기했다.
그는 9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석한 이후 사물놀이야말로 남과 북을 하나로 이을 수 있는 통합과 통일의 음악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평양에 도착하니까 북한에서 사물을 치고 환영을 해줘 우리도 사물을 치면서 행사장인 김일성경기장까지 같이 갔어요. 남과 북이 다 바뀌었어도 가락의 신명만은 바뀔 수 없구나 느꼈죠. 언젠가 통일이 됐을 때 지구촌 전체에서 같이 울려펴질 수 있는 것은 꽹과리와 징·북·장고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제에서 해방될 때도 숨겨놓았던 꽹과리·징·장고를 들고 나왔잖아요.” 그는 성사 직전에 두번이나 무산된 `남북하나로공연단’에 얽힌 비화도 털어놓았다. “98년 두번째 평양공연 때 남북 단일 공연단을 만들자고 북한당국에 제안해 2002년 월드컵 때 같이하기로 했으나 연평해전이 발생하는 바람에 무산됐어요.” “또한 지난해 11월 김정일 위원장의 측근인 김양건 북한통일전선부장이 남쪽을 비공식 방문했을 때도 만나서 구두합의했어요. 베이징 올림픽 때 남북 하나로예술단을 만들어서 공연하고 연습도 개성공단에서 하기로 했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 악화로 아직 실현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꼭 이뤄지리라 믿습니다.” 도쿄/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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