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조(62·이바라키현·사진)
가수 한돌 일본공연 기획한 재일동포 장영조씨
동포사회에 직접 초청 등 ‘알리기 10년’
총련 일부공연 반대 불구 객석 ‘가득’
“한국은 느림의 미덕 잊은 것 같아요” 재일동포 2세 장영조(62·이바라키현·사진)씨는 10년 전 일본 민영방송 <티비에스>(TBS)에서 방영된 포크 싱어송라이터 한돌(54)의 <홀로아리랑>을 듣고 단박에 반해버렸다. 특히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손잡고 가보자/같이 가보자”라는 대목이 마음에 사무쳤다. “남과 북이 공동선언이니 거창하게 얘기하다가도 사소한 것 때문에 밑바닥으로 떨어져 다시 시작하곤 하는데 어려운 일에 부닥치면 잠깐 참고 기다리자는 한돌씨의 마음이 제 마음과 똑같았어요.” 20대 말~30대 초반에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활동가로 일하기도 했던 장씨는 총련 소속 민족학교 등에 방송내용을 100여개 녹화해 나눠주는 등 ‘홀로 아리랑의 홍보부장’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는 한국으로 한돌을 찾아가 포장마차에서 만나 밤새껏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이사로 있는 재일조선인등산협회의 산행에 초청하는 등 우의를 다졌다. 장씨는 최근 오랜 소원이었던 한돌의 재일동포 순회공연을 성사시켰다. 지난 5일 오사카 공연을 시작으로 고베(6일), 사이타마(10일), 도쿄(13일), 이바라키현(17일) 등 재일동포들이 많이 사는 6곳에서 ‘한돌 타래이야기’라는 이름으로 공연한다. 지역마다 10명 안팎씩 모두 60여명의 재일동포 ‘한돌팬’들이 공연실행위원으로 참가했다. 모두들 처음 해보는 일이어서 어려움도 많았고 일부 지역 총련조직에서 반대하는 곳도 있었지만 첫 공연은 비 오는 날씨 속에 500석 객석이 가득 찼다. 이바라키현에서 ‘야키니쿠’점(한국식 불고기집)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공연비용 마련을 위해 예금을 털어넣었지만 적자를 면하지 못했다. 1년간 공연에 정신을 쏟느랴 부인한테 “당신의 직업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잔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마음을 씻어주는 것 같다. 그의 노래 속에 담긴 고향에 대한 사랑, 하나된 조국에 대한 절절한 염원은 우리와 똑같다”는 많은 동포들의 감격에 찬 감상에 보람은 컸다. 더욱이 한돌은 공연 때마다 출연료를 “학생들 건강과 건강한 학교 만드는 데 써 달라”고 희사해 감동은 더욱 커졌다. 전자우편도 사용할 줄 모르는 컴맹인 그는 도쿄 아키하바라에까지 와서 기자재를 사서 한돌 공연 디브이디 100여 장을 제작해 민족학교 등에 배포하고 있다. “6·15 공동선언 이후 마음의 38선이 없어지면서 한국에도 열번 가량 방문했어요. 남과 북이 서로 장단점이 있지만 한국은 일본보다 더 돈이 위력을 떨치는 사회인 것 같아요. 바쁘게만 움직이는 한국 사회에서 한돌씨 같은 느릿느릿한 노래가 더 많이 불려지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1939년 일본에 건너와 해방 2~3년 전 이바라키현 조반탄광에서 석탄 운반하는 일을 했다. 어릴 적 일본인초등학교에서 차별을 당하고 “왜 나를 조선인으로 태어나게 했느냐”고 부모 원망을 많이 했다는 그는 중학교 때 민족학교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말을 배우면서 ‘장영조’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이바라키 지역 광산과 탄광에 끌려왔다가 숨진 조선인 노동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탑 ‘이바라키현 조선인납골탑’(1979년 건립)을 2006년 수리·복원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도쿄/글·사진 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총련 일부공연 반대 불구 객석 ‘가득’
“한국은 느림의 미덕 잊은 것 같아요” 재일동포 2세 장영조(62·이바라키현·사진)씨는 10년 전 일본 민영방송 <티비에스>(TBS)에서 방영된 포크 싱어송라이터 한돌(54)의 <홀로아리랑>을 듣고 단박에 반해버렸다. 특히 “가다가 힘들면 쉬어가더라도/손잡고 가보자/같이 가보자”라는 대목이 마음에 사무쳤다. “남과 북이 공동선언이니 거창하게 얘기하다가도 사소한 것 때문에 밑바닥으로 떨어져 다시 시작하곤 하는데 어려운 일에 부닥치면 잠깐 참고 기다리자는 한돌씨의 마음이 제 마음과 똑같았어요.” 20대 말~30대 초반에 재일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활동가로 일하기도 했던 장씨는 총련 소속 민족학교 등에 방송내용을 100여개 녹화해 나눠주는 등 ‘홀로 아리랑의 홍보부장’을 자임하고 나섰다. 그는 한국으로 한돌을 찾아가 포장마차에서 만나 밤새껏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이사로 있는 재일조선인등산협회의 산행에 초청하는 등 우의를 다졌다. 장씨는 최근 오랜 소원이었던 한돌의 재일동포 순회공연을 성사시켰다. 지난 5일 오사카 공연을 시작으로 고베(6일), 사이타마(10일), 도쿄(13일), 이바라키현(17일) 등 재일동포들이 많이 사는 6곳에서 ‘한돌 타래이야기’라는 이름으로 공연한다. 지역마다 10명 안팎씩 모두 60여명의 재일동포 ‘한돌팬’들이 공연실행위원으로 참가했다. 모두들 처음 해보는 일이어서 어려움도 많았고 일부 지역 총련조직에서 반대하는 곳도 있었지만 첫 공연은 비 오는 날씨 속에 500석 객석이 가득 찼다. 이바라키현에서 ‘야키니쿠’점(한국식 불고기집)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공연비용 마련을 위해 예금을 털어넣었지만 적자를 면하지 못했다. 1년간 공연에 정신을 쏟느랴 부인한테 “당신의 직업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잔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마음을 씻어주는 것 같다. 그의 노래 속에 담긴 고향에 대한 사랑, 하나된 조국에 대한 절절한 염원은 우리와 똑같다”는 많은 동포들의 감격에 찬 감상에 보람은 컸다. 더욱이 한돌은 공연 때마다 출연료를 “학생들 건강과 건강한 학교 만드는 데 써 달라”고 희사해 감동은 더욱 커졌다. 전자우편도 사용할 줄 모르는 컴맹인 그는 도쿄 아키하바라에까지 와서 기자재를 사서 한돌 공연 디브이디 100여 장을 제작해 민족학교 등에 배포하고 있다. “6·15 공동선언 이후 마음의 38선이 없어지면서 한국에도 열번 가량 방문했어요. 남과 북이 서로 장단점이 있지만 한국은 일본보다 더 돈이 위력을 떨치는 사회인 것 같아요. 바쁘게만 움직이는 한국 사회에서 한돌씨 같은 느릿느릿한 노래가 더 많이 불려지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1939년 일본에 건너와 해방 2~3년 전 이바라키현 조반탄광에서 석탄 운반하는 일을 했다. 어릴 적 일본인초등학교에서 차별을 당하고 “왜 나를 조선인으로 태어나게 했느냐”고 부모 원망을 많이 했다는 그는 중학교 때 민족학교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말을 배우면서 ‘장영조’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이바라키 지역 광산과 탄광에 끌려왔다가 숨진 조선인 노동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탑 ‘이바라키현 조선인납골탑’(1979년 건립)을 2006년 수리·복원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도쿄/글·사진 김도형 특파원 aip2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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