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타 히로토
미야티 히로토 “납치문제 빌미 ‘과거청산’ 실종 추악한 역사의 새로운 시작”
기무라 미쓰히로 “한·중 도발하는 야스쿠니 참배 일본의 대미종속 감추기 위한 것”
기무라 미쓰히로 “한·중 도발하는 야스쿠니 참배 일본의 대미종속 감추기 위한 것”
일본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극우 성향 아베 신조 총리의 등장 이후 급가속되던 일본의 우경화 흐름은 7·27일 참의원 선거의 자민당 참패로 일단 제동이 걸렸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과거사 문제는 해방 62돌을 맞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진 일본 인사 4명의 인터뷰를 통해 일본의 오늘을 진단하고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모색해본다.
“납치문제 빌미 ‘과거청산’ 실종 추악한 역사의 새로운 시작”
미야타 히로토 전 아사히신문 기자
천황제가 얼마나 큰 피해 주었는지 조선 어린이 처지에서 생각해봐야
2002년 여름 암투병을 끝내고 요양 중이던 전 〈아사히신문〉 기자 미야타 히로토(65)의 집 서가에서 그의 아버지의 유품이 우연히 발견됐다. 일제 패망기인 1945년 6월20일 〈아사히신문〉에서 발행된 화보집 〈싸우는 조선〉이었다. 제목과 달리 내선일체를 강요받고 민족성을 말살당한 조선인들의 신음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126쪽에 걸쳐 가득차 있었다.
“어리석은 체제옹호 책자라고 방치할 수도 있었지만 마음에 크게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혹시 이 추악한 책을 아버지가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는 이 신문이 내는 〈주간아사히〉의 편집장 출신인 아버지가 일제 선전책자를 편집·제작한 당사자였다면 “조선문제에 계속 간여해온 사람의 아들로서 어떤 형태로든 결말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방북으로 납치 피해자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광기로 뒤덮인 일본 언론의 보도 태도도 이 책을 다시 내는 한 계기가 됐다고 한다. 납치 문제로 ‘과거청산’은 일본 국민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를 “새로운 추악한 역사의 시작”이라고 생각한 미야타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며 〈싸우는 조선〉의 재출판을 결심했다. 62년만에 이 책을 다시 낸 미야타를 지난달 27일 도쿄 시내에서 만났다. 이 작업에 5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은 건강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100권이 넘는 자료를 섭렵하고 관계자를 취재해 사진마다 해설을 덧붙이느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사 사사를 통해 일제말 출판국 차장이었던 아버지가 〈싸우는 조선〉의 편집·제작을 담당했다는 것을 99% 확신했을 때 “아들로서 참담함을 견딜수 없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그는 설령 아버지가 저항을 했다고 해도 당시 〈아사히신문〉 자체가 일제의 찬양기구였기 때문에 “진실보도라는 본래의 길로 되돌아올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 말기 〈아사히신문〉 부사장이 두명이나 언론 통제와 국민 오도의 총지휘자 격인 내무상과 내각정보국 총재에 취임했다”며 “아사히신문사의 책임은 중대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아사히신문〉이 ‘신문과 전쟁’이라는 연재 기사를 통해 태평양 전쟁 기간 자사의 보도 태도를 자성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3·1운동, 관동대지진, 청-일전쟁 때의 보도는 보여주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야타는 이 책을 다시 펴내면서 ‘천황제’가 조선민족에게 얼마나 큰 굴욕과 인적·물리적 피해를 주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신사 참배를 강요당한 조선 어린이들의 처지가 돼 생각해보길 바란다. 군의 통수권을 쥔 쇼와(히로히토) 천왕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메이지·다이쇼·쇼와 등 역대 천황에게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배와 그것을 불러온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 미야타는 지난 6월 6월민주항쟁 20주년 기념사업인 ‘국제언론인 세미나’등의 행사와 강연에 참석하기 위해 4년만에 한국을 방문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한국의 거리에서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며 “무엇보다 자력으로 이룩한 민주화를 솔직하게 자축하는 모습이 부럽고 눈부셨다”고 말했다.
“한·중 도발하는 야스쿠니 참배 일본의 대미종속 감추기 위한 것” 기무라 미쓰히로 ‘잇수이카이’ 대표 일본 사회 보수화로 우익 ‘야성’ 잃어
남북정상회담 환영…아베정권 고립 우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기보다는 차라리 다케시마(독도의 일본 이름)를 우리나라 땅이라고 얘기하는 게 좋다.”
10일 도쿄 시내에서 열린 우익단체 잇수이카이(一水會)의 창단 35주년 행사에 앞서 만난 이 단체 대표 기무라 미쓰히로(50)는 아베 신조 총리의 역사인식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보였다. 그는 또 일본인들 사이에 대북 적대감이 만연해 있는 것과 달리, 남북 정상회담을 환영하는 등 북한과의 대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어떻게 생각하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A급 전범들이 도쿄전범재판에서 단죄됐기 때문에 침략전쟁을 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참배했다. 그것은 모순이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는 대미종속(미국에 일본을 식민지로 팔아넘기는 것)을 감추기 위해 한국과 중국을 도발하는 것이다.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찬반으로 우익인지를 가리기를 어렵다.
-아베 총리의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부인에 대해서는.
=일본 국가가 명령해서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것은 조금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군인이 위안부 모집을 위한 군속으로 가고, 민간업자의 모집에 정부의 묵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총리는 일본 국민들을 대표하는 사람이므로 한국을 방문해 할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왕의 전쟁책임은 어떤가? 일왕이 일찍 결단했으면 원폭투하도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당시의 사회 상황이나 의식·기준에서 보면, 모두가 어떻게 하든 천황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지면 안된다는 군부의 의지도 있었다.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다는 천황의 발언은 어떤 상황이든 나와선 안되는 것이다.
-우익 정권에서 우익운동이 더 위축된다는 얘기도 있다.
=우익운동이 시민운동화하면서 전위운동이 아니라 대중운동으로 변질되는 게 위험하다. 야성을 잃어버리고 인터넷을 이용해 익명으로 우익을 주장하는 ‘인터넷 우익’이 그런 모델이다. 전위적이고 야성적이라는 것은 체제를 변혁, 정권을 바꾸려는 것이다. 우익은 애초부터 반체제였다. 일부 우익운동은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방향을 상실했다.
-아베 총리의 개헌 노선에 대해서는.
=아베가 내세우는 ‘전후체제로부터의 탈각’은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해 미국과 함께 싸울 수 있는 나라로 만들자는 얘기다. 또 개헌을 해 전후 좌익이 강조해온 민주적 노선을 모두 잘라내겠다는 것이다. 자주헌법을 만드는 데는 찬성한다. 다만 유엔 결의에 따른 평화유지활동(PKO) 부대 파견이라든지, 아시아 집단안보체제의 구축 등을 발전적으로 논의해나면서 헌법을 바꿔야 한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굉장히 환영해야 할 회담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아베 정권을 고립화하기 위한 외교전략이 먹혀들어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물론 있다. 걱정은 있지만 납치문제는 납치문제 자체로 봐야 한다. 우선 일본과 북한 사이에 직접적 파이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한국이 북한이 대화하는 것도 동북아시아의 현재 상황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도쿄/글·사진 김도형 특파원aip209@hani.co.kr
“어리석은 체제옹호 책자라고 방치할 수도 있었지만 마음에 크게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혹시 이 추악한 책을 아버지가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는 이 신문이 내는 〈주간아사히〉의 편집장 출신인 아버지가 일제 선전책자를 편집·제작한 당사자였다면 “조선문제에 계속 간여해온 사람의 아들로서 어떤 형태로든 결말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방북으로 납치 피해자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광기로 뒤덮인 일본 언론의 보도 태도도 이 책을 다시 내는 한 계기가 됐다고 한다. 납치 문제로 ‘과거청산’은 일본 국민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를 “새로운 추악한 역사의 시작”이라고 생각한 미야타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며 〈싸우는 조선〉의 재출판을 결심했다. 62년만에 이 책을 다시 낸 미야타를 지난달 27일 도쿄 시내에서 만났다. 이 작업에 5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은 건강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100권이 넘는 자료를 섭렵하고 관계자를 취재해 사진마다 해설을 덧붙이느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사 사사를 통해 일제말 출판국 차장이었던 아버지가 〈싸우는 조선〉의 편집·제작을 담당했다는 것을 99% 확신했을 때 “아들로서 참담함을 견딜수 없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그는 설령 아버지가 저항을 했다고 해도 당시 〈아사히신문〉 자체가 일제의 찬양기구였기 때문에 “진실보도라는 본래의 길로 되돌아올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 말기 〈아사히신문〉 부사장이 두명이나 언론 통제와 국민 오도의 총지휘자 격인 내무상과 내각정보국 총재에 취임했다”며 “아사히신문사의 책임은 중대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아사히신문〉이 ‘신문과 전쟁’이라는 연재 기사를 통해 태평양 전쟁 기간 자사의 보도 태도를 자성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3·1운동, 관동대지진, 청-일전쟁 때의 보도는 보여주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야타는 이 책을 다시 펴내면서 ‘천황제’가 조선민족에게 얼마나 큰 굴욕과 인적·물리적 피해를 주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신사 참배를 강요당한 조선 어린이들의 처지가 돼 생각해보길 바란다. 군의 통수권을 쥔 쇼와(히로히토) 천왕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메이지·다이쇼·쇼와 등 역대 천황에게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배와 그것을 불러온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 미야타는 지난 6월 6월민주항쟁 20주년 기념사업인 ‘국제언론인 세미나’등의 행사와 강연에 참석하기 위해 4년만에 한국을 방문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한국의 거리에서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며 “무엇보다 자력으로 이룩한 민주화를 솔직하게 자축하는 모습이 부럽고 눈부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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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도발하는 야스쿠니 참배 일본의 대미종속 감추기 위한 것” 기무라 미쓰히로 ‘잇수이카이’ 대표 일본 사회 보수화로 우익 ‘야성’ 잃어
남북정상회담 환영…아베정권 고립 우려
기무라 미쓰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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