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정상회담’ 시민들 왜 차분한가
“(남북 정상이) 만난다는데 반갑지. 하지만 2차 회담 한다고 여러 차례 얘기가 나왔잖아. 뭐 특별히 나올 게 있겠어? 그래도 자꾸 만나야 하지.”
2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가 공식 발표된 지 이틀 뒤인 10일, 서울 신촌에서 만난 택시기사 황영우(54)씨는 차분하게 말했다. 대학생 김은희(24·여)씨는 “7년 전과는 다르게 주위 사람들 반응이 별로 없어 놀랐다”며 “문화 교류나 이산가족 문제 등 실질적이고 다양한 논의가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1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가 발표된 2000년 4월, 전국은 금방이라도 통일이 이뤄질 듯 감동과 기대로 가득 찼다. ‘은둔자’로만 알려졌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호탕한 성격에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다고 재평가가 이뤄질 정도로 사회 분위기는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7년 뒤 시민들은 남북 정상의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면서도 들떠 있지는 않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정치외교학)는 “2000년 정상회담은 역사적인 첫 상봉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며 “이후 장관급 회담 등 남북의 만남이 정례화한 가운데 북핵 사태 뒤 북한이 6자 회담에 참여하고 있고 정상회담 소문이 계속 돌았던 만큼 국민들이 차분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남북 관계의 진전에 따라 ‘통일로 가는 과정’을 일상의 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박경순 한국진보운동연구소 소장도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사업 등이 궤도를 잡아가는 등 남북 민간교류와 경제협력이 이뤄지면서, 남북을 오가는 일이 자연스러워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북한을 대하는 남쪽 사람들의 태도도 지난 10여년 사이 크게 달라졌다. 1994년 북핵 위기 때 북한이 ‘서울 불바다’ 발언에 이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성명을 내자, 생필품 ‘사재기’ 현상까지 빚어졌다. 하지만 남북 정상회담 뒤인 2002년 6월, 북한 경비정의 기습 포격으로 남북 함정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어도 민심에 큰 동요는 없었다.
진희관 인제대 교수(통일학부)는 “김대중 정부 초기 북한이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보수단체들은 대북 지원 창구를 통일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얘기했지만, 2004년 용천역 사고 때는 보수진영이 지원 활동에 앞장서는 등 큰 변화가 있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대선을 앞둔 국내 정치 상황 때문에 정치적 전략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도 있지만, 북한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 변화를 고려할 때 이번 회담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면 국민들의 기대는 또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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