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기지 확장·이전에 맞서 투쟁해온 경기 평택시 대추리 주민들은 13일 “한국팀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으로 거두고 국민들의 기분도 좋아져, 대추리 문제도 잘 풀리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대추리 주민들이 지난 11일 평택시 대추리 농협창고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평택/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대추리 주민·KTX 승무원·시각장애인들
월드컵 열풍에 ‘생존 투쟁’ 현실 파묻혀 아쉬워
“2002년엔 축구가 세상 전부인 것처럼 즐겼는데…”
월드컵 열풍에 ‘생존 투쟁’ 현실 파묻혀 아쉬워
“2002년엔 축구가 세상 전부인 것처럼 즐겼는데…”
한국 정부나 사회와 불화하거나 갈등하는 이들에게도 한국 축구대표팀의 첫 경기는 큰 관심사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목소리나 현실이 ‘월드컵 열풍’에 묻히는 아이러니 탓에 경기를 마음 편하게 볼 수만은 없었다.
미군기지 확장·이전을 반대하며 투쟁하는 평택시 대추리 주민들은 13일 밤 토고전에 나선 한국 대표팀을 열심히 응원하면서도 자신들의 생존권을 둘러싼 문제가 월드컵에 묻힌 데 대해 섭섭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대추리 주민 김택균씨는 “2002년에는 동네 청년들이 모여앉아 함께 응원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며 썰렁해진 마을 분위기를 아쉬워했다. 하지만 김씨는 “한국팀이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나라 전체가 기분이 좋아져 대추리 문제도 잘 풀리지 않겠느냐. 우리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길 빌고 있다”며 기대감을 보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으로 마음 편할 날 없는 농민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성도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처장은 “자유무역협정으로 농민들이 힘든데, 방송에서는 온통 월드컵 이야기뿐이다. 농민·서민들의 소식도 전해야 한다”며 방송사에 섭섭함을 내비쳤다. 전 처장은 “국민들이 월드컵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고된 현실과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어하는 욕구 때문일 것”이라며 “농민들의 고된 현실에도 귀기울여 달라”고 호소했다.
철도공사에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100일 넘게 파업을 벌이고 있는 케이티엑스(KTX) 여승무원들도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윤선옥 케이티엑스 승무지부 부대변인은 “나도 2002년 월드컵 때는 축구가 세상에 전부인 것처럼 즐겼고, 이번에도 한국의 승리를 응원할 것”이라며 “생존을 위해 힘들게 투쟁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케이티엑스 여승무원들은 이날 농성을 잠시 쉬었으며, 한국과 토고의 경기도 농성장이 아닌 집에서 각자 응원했다.
‘안마사 자격을 시각장애인으로 제한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 뒤 항의농성을 계속해온 시각장애인들은 “다른 국민들과 더불어 월드컵 축제에 동참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비애를 느낀다”며 투쟁을 중단할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한편 경기 안산 등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선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인들과 함께 한국팀을 응원하며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방글라데시 출신의 샤킬(40) 이주노조위원장 전 직무대행도 퇴근 뒤 안산에 사는 친구들 5~6명과 함께 빨간 티셔츠를 입고 화랑유원지에 모여 토고전을 함께 봤다. 그는 “2002년 시청 앞에서 경기를 볼 때도 한국인들과 함께 즐겼는데, 이번 월드컵에서도 마찬가지”라며 “이렇게 어울리다 보면 서로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조혜정 이재명 김소연 기자 zesty@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