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통화 내용을 한 사람이 상대방 동의 없이 몰래 녹음한 경우, 그 경위와 내용에 비추어 사생활을 중대하게 침해했다면 증거로 쓸 수 없다는 대법원의 첫 판단이 나왔다.
지난달 14일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위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최아무개씨 등 4명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상고기각으로 확정하면서 이같이 판시했다. 이들은 2019년 3월 치러진 지역수협 조합장 선거에서 선거인들에게 금품을 건네는 등 위법한 선거운동을 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선거운동원이었던 최씨의 휴대전화를 압수해 분석하던 중 다수의 통화녹음 파일을 입수해 증거로 제출했다.
문제는 최씨 휴대전화에서 나온 통화녹음이 ‘최씨 몰래’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사건 발생 3년 전부터 최씨의 아내가 남편의 불륜을 의심해 남편 몰래 휴대전화 자동 녹음기능을 활성화했고, 최씨가 모르는 상태에서 통화녹음이 생성된 것이다. 녹음 당사자가 대화에 참여할 경우 상대방 동의 없이 대화를 녹음해도 원칙적으로 문제가 없다. 하지만 피고인들은 최씨 아내의 ‘불법 감청’에 해당한다며 증거로 쓸 수 없다고 주장했다. 통신비밀보호법 4조는 ‘불법감청에 의한 전기통신 내용은 재판에서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다.
1·2심은 이들 혐의를 대부분 유죄로 인정해 징역형을 선고했다. 1심은 최씨 휴대전화에서 나온 통화녹음 전부의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2심은 최씨와 최씨 아내 사이의 통화녹음만 증거로 인정하고, 최씨와 다른 피고인들 사이 통화녹음의 증거능력은 부정했다. ‘최씨와 다른 피고인들 사이의 통화녹음’은 최씨 아내가 남편과 통화 상대방들의 동의 없이 녹음한 불법감청이라는 점이 인정된 것이다.
상고심 쟁점은 2심이 증거능력을 인정한 ‘최씨 부부 사이의 통화 내용’에 관한 판단이었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증거 사용이 가능하다고 보고 유죄 판단을 유지했다. 아내가 최씨의 사생활을 침해했다고 볼 여지는 있지만 통화 당사자이고, 은밀하게 이뤄지는 선거 범죄의 특성상 녹음 파일을 증거로 사용할 필요성도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대법원은 녹음 당사자가 대화에 참여해 녹음했다 해도 ‘사생활 침해가 중대하면’ 증거로 쓸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증거 수집 절차가 개인의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해 사회 통념상 허용되는 한도를 벗어난 것이라면 단지 형사소추에 필요한 증거라는 사정만을 들어 곧바로 형사소송에서 진실발견이라는 공익이 개인의 인격적 이익 등 보호이익보다 우월한 것으로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설시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전화통화 일방당사자의 통화녹음 파일의 증거능력이 문제된 사건에서 통신비밀보호법 제4조에 따라 증거능력이 부정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녹음 경위와 내용 등에 비춰 사생활 내지 인격적 이익을 중대하게 침해한 경우 증거능력이 부정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밝혔다”고 의의를 설명했다. 다만 대법원이 이번 판결에서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밝히지는 않아 어떤 상황에서 증거능력이 부정될 수 있는지는 향후 법원 판결이 누적되어야 분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