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뉴스레터 H:730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h730’을 쳐보세요.
임차인(세입자)의 계약갱신청구권을 신설한 개정 주택임대차보호법이 통과된 뒤에도 임대인(집주인)이 ‘실거주’를 이유로 계약갱신 청구를 거절하는 사례가 빈발하는 가운데 대법원이 ‘실거주 의사 입증 책임은 집주인에게 있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실거주 입증 책임은 본래 집주인에게 있지만 그동안 법원이 구체적인 입증을 요구하지 않아 사실상 ‘집주인의 실거주 의사는 거짓’이라는 점을 세입자가 입증해야 했다. 실거주 의사를 갖게 된 경위, 실제 이사 준비 정도 등까지 입증해야 한다는 이번 판결로 세입자의 계약갱신청구권이 보다 폭넓게 보장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집주인 ㄱ씨가 세입자 ㄴ씨를 상대로 낸 주택인도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한 판결을 ‘집주인 실거주 의사에 대한 검증이 부족했다’며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6일 밝혔다.
ㄱ씨는 서울 서초구 아파트를 보증금 6억3천만원에 2019년 3월부터 2년간 ㄴ씨에게 임대하는 전세 계약을 2019년 1월 맺었다. 계약 당시 ㄱ씨는 자녀들을 국제학교에 보내기 위해 제주도 주택에, ㄱ씨 남편은 직장 때문에 서울의 다른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계약 종료를 3개월여 앞둔 2020년 12월 ㄱ씨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자녀들을 제주 국제학교에 보낼 수 없게 됐다. 남편이 사는 아파트도 급매로 팔아 가족이 이 아파트에 들어와 함께 살 계획”이라며 ㄴ씨의 계약갱신청구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은 계약종료 2개월 전까지 세입자가 계약갱신을 1회에 한해 요구할 수 있고, 집주인은 정당한 사유 없이 이를 거절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정당한 사유 중 하나는 집주인 또는 집주인 직계존비속의 실거주다.
세입자 ㄴ씨는 ㄱ씨의 실거주 의사를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세입자와 집주인 사이에 계약갱신 청구와 거절의 뜻을 담은 내용증명이 오간 뒤 ㄱ씨는 ㄴ씨에게 주택인도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ㄴ씨는 ㄱ씨가 처음에는 자기 가족이 실거주하겠다고 했다가, 소 제기 뒤에는 노부모가 거주할 예정이라고 말이 달라진 점을 들어 “거짓으로 부당하게 갱신거절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ㄱ씨 노부모는 최근 10여년간 1년에 1∼5차례 통원 치료를 받았을 뿐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 ㄱ씨는 제주 생활을 청산하지 않았고, 급매로 팔겠다던 또 다른 아파트도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내놓은 채 보유 중이었다.
1·2심 재판부는 ㄴ씨의 의심을 뒷받침할 정황을 인정하면서도 “원고(집주인)가 이 아파트를 다른 사람에게 임대하거나 매도하려고 시도하는 등 실거주계획과 명백히 모순되는 행위를 한 사정을 찾을 수 없는 한, 원고의 갱신거절은 적법하다”며 집주인의 손을 들어줬다. ‘실거주 의사’라는 것은 미래의 계획에 대한 것이라 적극적인 입증이 쉽지 않고, 지나치게 세세히 증명할 것을 요구할 경우 사생활의 지나친 공개를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그동안 하급심은 이 사건 원심과 유사하게 ‘집주인의 실거주 목적을 의심할만한 합리적인 사유가 존재한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인정되는 경우’에만 세입자 손을 들어줬다. 법은 집주인에게 실거주 의사의 입증 책임을 요구하고 있지만, 법원의 이런 태도 때문에 사실상 세입자가 ‘집주인의 실거주 의사의 진위’를 입증해야했다.
대법원은 실거주 의사 입증 책임을 세입자에게 돌려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실거주 의사 판단 기준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대법원은 “집주인의 주거 상황, 집주인이나 가족의 직장·학교 등 사회적 환경, 집주인이 실거주 의사를 가지게 된 경위, 임대차계약 갱신요구 거절 전후 집주인의 사정, 집주인의 실거주 의사와 배치·모순되는 언동의 유무, 집주인의 이사 준비 여부 등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민생경제위원회는 논평을 내어 “세입자가 집주인의 신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급심의 법 해석대로라면 사실상 집주인이 실거주를 이유로 나가라고 하면 세입자는 나갈 수밖에 없게 된다. 세입자의 계약갱신요구권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라며 “대법원 판결은 기존의 잘못된 하급심 판결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밝혔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