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임대인과 민사소송 중이었던 임차인 ㄱ씨는 소송 과정에서 임대인이 기존 계약서의 내용을 조작해 소송의 증거자료로 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계약서의 두번째 쪽에는 기존 계약서에 없던 ㄱ씨에게 불리한 특약사항이 적혀 있었는데, ㄱ씨의 도장도 그대로 찍혀 있었다. ㄱ씨는 임대인을 ‘사문서 위조’로 고소했다. 검찰은 계약서 각 장에 찍힌 간인(서류가 여러 장일 때 그 용지가 서로 이어졌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문서 여러 장을 겹쳐 도장을 찍는 것)끼리 인주 성분이 같은지 확인해달라고 대검에 감정 요청을 했다. 대검은 분석에 들어갔지만 인주 간 성분의 미세한 차이까지 가려내긴 어려워 결국 ‘판단불명’이라고 통보했다.
앞으로는 도장에 찍힌 인주 감정을 통해 이런 계약서 조작 여부를 가려낼 수 있게 됐다. 대검 과학수사부 법과학분석과 문서감정실은 ‘국내시판 인주 분석 자료 데이터베이스화’ 연구용역을 충남대학교 법과학연구소(최미정 책임연구원)에 맡겨 인주 73종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고 3일 밝혔다.
지난 7월 연구에 들어간 연구팀은 우선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대만 등 6개국 33개 회사에서 생산되는 인주를 모두 수집했다. 변연부(볼록판 인쇄에서 잉크가 진하게 묻는 부분), 인주입자, 색상별로 구분해 인주 시료를 분류했다. 분광비교측정장비(VSC)와 적외선분광기(FT-IR) 등을 이용해 분광학적 특성도 분석했다. 이렇게 분류한 인주들을 시료의 특성별로 코드화했고, 이를 토대로 인주 시료 73개의 성분을 식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주 간 성분 차이는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그동안은 분석하더라도 인주의 양 때문에 차이가 나는 것인지 성분 때문인지 판단이 어려웠다. 이제는 시중의 모든 인주가 대검의 감정을 통해 이른바 ‘디엔에이(DNA)’ 분석이 가능해졌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문서감정실 소속 윤기형 감정관, 홍현식 감정관, 윤영미 문서감정실장. 대검찰청 제공
지난해 기준 대검에 의뢰된 인주 동일여부 감정 건수는 28건이다. 전체 문서 감정 의뢰건 중 3% 정도지만, 계약사기 사건에선 조작·위조 수법이 아주 교묘하다보니 인주 감정이 결정적인 입증 수단으로 쓰일 때가 많다는 게 대검의 설명이다.
이밖에도 문서감정 분야에는 문서에 쓰인 글씨(필적), 필기구(잉크), 인영(도장 모양) 분석 등이 있다. 종이를 만들 때 쓰이는 충전제의 성분 등 분석으로 지질 감정을 통해 문서 위·변조를 판단하기도 한다. 대검 관계자는 “이번 인주 성분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통해 앞으로 각종 계약서 위조 사기 사건에서 감정 의뢰가 늘 것으로 보인다. 판단불명율도 0%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오연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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