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공직에 나가 있는 3년 동안 내가 경험하는 일들을 모두 기록할 것이다.”
박찬운(60)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가인권위(인권위) 상임위원으로 처음 출근하던 2020년 1월13일 그렇게 결심했다. 기록하고 또 기록해 내 경험을 역사로 만드는 것이 공직에 출사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여겼다. 인권수호의 최후보루라는 인권위에서 주요 의결권한을 지닌 차관급 공직자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공적인 기록물은 많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토론과 갈등이 있었는지 정리한 사람은 없었다. 인권위 첫날 새벽부터 일기를 썼다. 하루에 벌어졌던 일을 쓰고 주요 토론 내용이나 결정문을 옮기기도 했다.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혜윰터)는 박 교수가 3년1개월 동안 쓴 일기를 토대로 인권위 상임위원 3년을 기록한 책이다. 일기의 분량은 무려 200자 원고지 기준 6000장 정도다. 인권위 전원위원회와 소위원회에서 소화했던 수많은 진정 사건 및 정책에 관한 결정과 그 과정에서 겪었던 일들을 담았다. 박 교수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권위원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권위원에 적합한 감수성과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쓸데없이 인권위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도 담겨있다고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인권위가 내홍을 겪는 시점이기에 이 책의 출간은 각별해보인다. 29일 오전 한겨레신문사 5층 회의실에서 박 교수를 만나 책 이야기와 함께 최근의 인권위 상황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2022년 7월1일, 군인권보호관이 출범했다. 왼쪽서 네번째가 송두환 위원장, 그 오른쪽이 박찬운 당시 군인권보호관. 박찬운 제공
박찬운 교수가 군인권보호관 시절 주재했던 군인권보호위원회. 2022년 7월1일 출범 제1차 회의장면이다. 박찬운 제공
박 교수는 인권위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희롱 사건을 심리하던 때라고 회고했다. 다섯 시간이 넘는 회의 끝에 기진맥진했고, 끝 모를 우울함에 눈물이 터져 나오기도 했단다. 당시 전원위에서 했던 발언은 이러했다.
“인권위는 인권신장을 위해 만들어진 국가기관으로서 인권침해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그 대상이 어떤 사회적 지위나 명성이 있다고 해도 공정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고인의 공적과 과오의 구별은 엄격해야 합니다.(…)불편부당한 입장에서 국민들의 인권위에 대한 기대에 부응해야 합니다.”
인권위는 당시 박원순 사건에서 사실인정을 매우 보수적으로 했다고 한다.
“여러 진술이나 물적 증거 등을 통해 인권전문가라면 누구도 의심하기 어려운 부분은 사실로 인정했지만 다른 반대증거에 의해 사실확정이 어려운 부분은 하지 않았어요.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서울시 비서실이 구조적으로 성적 고정관념에 의해 비서 운용을 하고 있다는 것, 젊은 여성만을 시장의 지근거리에서 비서 업무를 하도록 한 것은 성희롱 등에 무방비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었죠. 이런 사실들을 인정하며 서울시, 여성가족부 등에 관련 권고를 했습니다.”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박 교수는 임기 후반 7개월간 초대 군인권보호관을 겸직하기도 했다. 책에는 군인권보호관의 지휘체계를 놓고 송두환 위원장 및 사무처와 긴장관계를 빚는 장면이 나온다. 박 교수는 군인권보호업무는 보호관이 사무처를 직접 지휘할 수 있도록 업무처리 체계를 제안했지만, 송 위원장과 사무처는 위원장의 사무처 지휘에 혼선을 가져올까 봐 우려하고 결국 벽에 부닥친다. 박 교수는 “요즘 인권위 사태를 미리 예견하지 않았나 생각한다”며 웃었다. “만일 제 말대로 군인권보호관의 운영방법이 정해졌다면 요즘 인권위가 더 큰 내홍을 겪지 않았을까요?”
이는 2대 군인권보호관을 겸임 중인 김용원 상임위원 이야기다. 김 상임위원이 군인권보호관을 맡은 이후 뭔가 시끄러운 일들이 많았다. 국감에서 야당 의원들은 “채아무개 상병 순직 사건 수사에 대한 군인권보호관의 입장이 바뀌었다”고 질타했고, 군인권보호관은 군인권센터와 군사망자 유족들을 경찰에 수사의뢰하기도 했다. “인권위 역사상 이런 일은 없었다”는 박 교수는 “김용원 상임위원이 속히 유족에게 손을 내미는 결단을 내려주길 간곡히 바란다”고 했다.
“군대 내에서 사망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군인들의 가족들을 지원하는 군인권센터는 오늘의 군인권보호관을 만든 주인공들입니다.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이분들의 말씀을 경청하고 업무에 반영하는 것이 군인권보호관의 태도라고 봅니다.”
인권위를 떠나던 2023년 2월6일, 인권위 직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박찬운 제공
최근 소위원회에서 3명 중 1명만 반대해도 해당 진정이 기각되도록 의결방식을 바꾸는 문제에 관해서는 “인권위법 제13조가 합의에 따른 의결을 요구하고 있기에 법률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설령 전원위에서 표결로 밀어부친다 해도 결국 사법적 판단을 통해 구제될 거라고 본다”고 했다. 법률의 내용을 규칙으로 바꾼 셈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권위를 연구하려는 학자, 인권위를 직장으로 삼으려는 사람, 인권위에 진정을 내려는 인권침해 당사자들에게 매우 유용한 책이다. 변희수 하사 사건, 탈북어민 강제송환, 스텔라데이지호, 평등법 제정 권고, 낙태법 폐지와 노란봉투법 의견 표명 등 인권위에서 쟁점이 됐던 사건과 정책들이 어떤 시스템과 구조 속에서 처리되는지, 파열음과 갈등 속에서도 어떻게 합의되는지를 친절하게 보여준다. 부록으로 ‘결정문 작성 예시’도 있다. 더불어 보수와 진보의 균형추가 흔들릴 때도 추구해야 할 ‘인권위다움’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곱씹어보게 한다.
박 교수는 본인이 소수파로 고립됐던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가령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유튜브 방송에 나와 “후천성 장애인이 선천성 장애인보다 의지가 강하다”고 한 발언에 따른 진정사건에서는 10명 중 혼자만 “각하 뒤 의견표명”으로 달랐다. 정신장애인의 인권증진을 위한 특집기사를 쓰면서 ‘미친 사람’들과의 인터뷰라고 부제를 단 국민일보 사건에서는 어떤 의견을 냈다가 “장애인 인권감수성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도대체 어떤 논리를 펼쳤길래. 자세한 내용은 의견문과 함께 책에서 볼 수 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