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작품을 구입하면 저작권료를 받을 수 있다고 안내하는 서울 강남의 한 갤러리 누리집 갈무리
경찰이 아트테크(아트+재테크)를 내세워 투자금을 끌어모은 뒤, 최소 200명 넘는 투자자들에게 돈을 돌려주지 못한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갤러리 대표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이 갤러리는 작품 소유권이 없으면서도 일부 투자자들에게 작품 판매를 한 정황도 드러나, 투자자 돈을 ‘돌려막기’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고 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청담동의 한 갤러리 정아무개(44) 대표와 직원 ㄱ씨를 사기 등의 혐의로 수사 중이라고 28일 밝혔다. 강남서에만 피해자 15명이 고소하는 등 전국적으로 추가 고소가 이뤄지면서, 피해자 수와 피해액은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강남서에 정씨를 고소한 유아무개(41)씨는 “지난해와 올해 걸쳐 구매한 그림 3점의 구입 원금 3000만원과 저작권료 일부의 지급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갤러리 쪽이 지난 9월부터 서버 오류 등 각종 핑계를 대며 환급을 미뤘다는 것이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 가입한 피해 투자자 수는 약 230명이다. 갤러리와 투자자들은 이 업체에 투자한 전체 고객이 950명가량이라고 밝혔다. 유씨는 “1억원대 피해를 본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많게는 45억원 투자했다는 사람도 봤다”며 피해 규모가 수백억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대학생 포함 20~30대 젊은층, 퇴직금을 전부 투자한 노년층 등 다양한 것으로 파악됐다.
2019년 문을 연 이 갤러리는 투자자들이 갤러리 소속 작가의 그림 소유권을 구매하면, 해당 그림을 국내외 전시 등에 대여해 생긴 수익을 바탕으로 매달 구입액의 1%를 저작권료로 지급하는 방식의 재테크 서비스라고 홍보해왔다. 그림 소유권을 최대 3년까지 매해 재계약할 수 있고, 계약 종료 시 원금 전액 현금화가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많은 투자자가 몰렸다.
저작권료 미지급 공지를 알리는 안내글. 갤러리 누리집 갈무리
그러나 지난 7월부터 구입 원금이 환급되지 않자 투자자들의 항의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갤러리 쪽이 사내 서버 오류, 은행 대출 심사 지연 등의 이유로 지급을 미루면서 피해자들이 형사 고소 등 공동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
일부 그림은 소속 작가들이 이 갤러리에 대여하거나 소유권을 판매하지 않았는데도 투자자들에게 그림에 대한 소유권을 판매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날 한겨레가 접촉한 갤러리 소속 작가 ㄴ씨도 “(갤러리에) 그림을 대여하거나 판매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피해자 단체 채팅방에는 해당 작가의 그림을 구입했다며 피해를 호소하는 글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일부 피해자의 변호를 맡은 박보준 변호사(법무법인 기성)는 “일부 작가는 그림을 대여만 해줬다. (갤러리가) 실제 소유권을 넘겨받지 않고 판매한 것”이라며 “명백한 폰지 사기”라고 주장했다. ‘폰지 사기’는 투자 사기 수법의 하나로 이윤 창출 없이 투자자들의 돈을 돌려막으며 다른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해당 갤러리 쪽은 “작가들과의 계약서에서 ‘결제를 유예한다’고 명시했고, 유예 대가로 매달 창작 지원금 명목인 0.5~1% 계약금 지급과 재료 등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다”며 “작가들은 돈을 아직 못 받았으니 판 적이 없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유예 기간 동안 작품 소유권은 갤러리에 있다”고 해명했다.
정 대표는 한겨레에 “지급이 늦어지는 것은 회사 영업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며 “부동산 등 자산을 정리해 12월 초까지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대여 그림을 판매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윤연정 기자
yj2gaze@hani.co.kr 김채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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