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대전시 유성구 도시철도 1호선 현충원역 앞에 세워진 ‘홍범도장군로’ 안내판 옆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대전/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8월 광복절 축사에서 “우리는 공산 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 추종 세력에게 속거나 굴복해선 안 된다”고 했다. 같은 달 28일 국민의힘 연찬회에서는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다.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철학이 바로 이념”이라고도 했다. 대통령의 신호에 따라 정부는 ‘이념전쟁’을 시작했다. 육군사관학교는 소련 공산당 가입 전력이 있다는 이유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철거하겠다고 밝히면서 불을 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념전쟁이 지지율 반등에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민생을 강조하며 한발 물러선 모양새지만, 이념전쟁의 여파는 전국으로 확산했다. 이념전쟁의 국지전이 이어지고 있는 대전과 광주, 경남 통영과 밀양을 찾아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홍범도장군로 앞 대전시민 ‘손사래’
지난 14일 오후 대전시 유성구 구암동 도시철도 1호선 현충원역 앞. ‘홍범도장군로’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곳이다. 바로 앞에는 광복회 유성구지회가 내건 “홍범도장군로는 우리가 지킨다”라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홍범도장군로’는 이곳에서 국립대전현충원(2.02㎞) 구간을 가로지르는 도로 이름이다. 대전 유성구는 2021년 홍범도 유해가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같은 해 9월 ‘홍범도장군로’라는 이름의 명예 도로를 지정했다.
이곳은 윤석열 정부의 이념전쟁 직격탄을 받은 곳이다. 이장우 대전시장은 지난 9월7일 정례브리핑에서 “홍범도 장군의 인생 궤적을 확실하게 추적해야 한다”며 “공보다 과가 많은 상황이라면 현충원 앞에 조성된 ‘홍범도장군로’도 폐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 추모식’이 열린 지난달 25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도 여진이 이어졌다. 윤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배치됐는데, 일부 참석자들이 항의하며 화환을 뒤로 돌려놓기도 했다. 이날 추모식엔 영화 ‘암살’(2015)에서 독립군 조연 추상옥(별명 ‘속사포’)으로 열연했고 2021년 홍범도 유해 국내 봉환 과정에 국민특사로 참여한 조진웅 배우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지난 9월10일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최로 열린 ‘홍범도장군로 시민 걷기 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홍범도 장군 묘역으로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홍범도장군로’ 표지판 앞에서 50여명의 시민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특별한 관심이 없는 듯 대부분 손사래를 쳤다. 어렵사리 의견을 밝힌 최지혜(가명)씨는 “대학 졸업반인데 취업이 걱정이다. 정치권에서 이런 논쟁보다 일자리나 좀 더 만드는 경쟁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60대 시민은 “홍범도가 공산주의 활동을 한 걸 잘 몰랐다. 정부가 정확한 내용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념전쟁과 연관된 지역의 단체장들도 이 사안에 의견을 밝히길 꺼렸다. 이장우 대전시장, 강기정 광주시장, 천영기 통영시장, 박일호 밀양시장은 “일정이 바쁘다”, “시정을 살펴야 해서 시간이 없다”, “할 말이 없다”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관련 도시의 한 공무원은 “이념전쟁 한가운데에 시장님이 빠지면 표에도 도움이 안 되고, 시정에도 도움이 안 된다”며 솔직한 생각을 드러냈다.
다만, ‘홍범도장군로’ 도로명을 부여한 정용래 대전 유성구청장은 인터뷰에 응했다. 정 구청장은 “명예 도로명 부여와 폐지 권한은 구청장인 저에게 있고 유성구는 홍범도 장군의 뜻을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받는 일을 더욱 확대해나갈 것”이라며 이장우 시장의 ‘홍범도장군로’ 폐지 구상을 일축했다. 정 구청장은 “홍범도 장군은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로 충분한 역사적 검증을 거쳤고, 유해를 모시고 온 2021년에도 논란은 없었다”며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이다. 이를 왜곡하는 것은 항일 의병과 독립군,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우리 국군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 구청장은 “홍범도 장군은 반공이 국시였던 시대에도 최고의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은 인물”이라며 “홍범도 장군의 공산당 가입은 일본에 맞서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당시 소련의 공산당과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의 공산당은 다르다. 현재 광주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음악가 정율성과는 결이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정율성, 과거 한-중 우호의 상징”
지난 20일 광주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거리’ 들머리에 있는 정율성 흉상이 손상된 채 초석만 방치돼 있다. 광주/이정용 선임기자
정 구청장이 말한 음악가 정율성의 고향인 광주를 찾았다. 지난 15일 오후 광주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거리’에 세워진 정율성 흉상은 볼 수 없었다. 보수단체 회원이 지난달 14일 새벽 1시30분께 흉상 목에 밧줄을 건 뒤 자신의 승합차에 연결해 쓰러뜨렸다. 지난달 2일에도 같은 방법으로 흉상을 훼손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사업을 반대하기 위해 그랬다”고 진술했다.
훼손된 정율성 흉상은 2009년 7월에 세워진 것이다. 남광주 청년회의소가 중국 광저우시 하이주구 청년연합회에서 기증받았고, 광주 남구청이 같은 자리에 세웠다. 흉상 훼손 이유가 된 ‘정율성 역사공원’은 광주시가 2020년 동구 불로동 정율성 생가 일대에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48억원을 들여 올해 연말까지 완성하기로 했지만, 토지 소유자와 분쟁을 겪으며 준공이 내년 4~5월로 미뤄졌다.
앞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지난 8월28일 전남 순천을 찾아 ‘정율성 역사공원’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박 장관은 “‘공산당 나팔수’를 기억하게 하고 기리겠다는 시도에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국민의 소중한 예산은 단 1원도 대한민국의 가치에 반하는 곳에 사용할 수 없다. 장관직을 걸고 ‘정율성 역사공원’을 저지하겠다”고 했다. 이어 지난 11일에는 기자회견을 열어 “‘정율성 역사공원’ 등 기념사업을 즉각 중단하고, 이른 시일 안에 이미 설치된 정율성 흉상 등 기념시설도 철거할 것”을 권고했다. 권고를 이행하지 않으면 시정명령을 발동하겠다고도 했다. 광주시는 이를 수용할 뜻이 없다고 반박했다.
15일 ‘정율성거리’에서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전사한 고 서정우 해병대 하사(1계급 추서)의 어머니인 김오복씨를 만났다. 광주 대성여고 교장 등을 지낸 김씨는 올해 2월 정년퇴임하며 37년 교직 생활을 마무리했다. 지난 3일에는 박 장관과 함께 정율성 흉상과 생가를 둘러봤다. 김씨는 “지난 8월 강기정 광주시장에게 카톡으로 ‘호국 유공자는 무관심하면서 북한과 중국 공산 세력을 도운 정율성을 기념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보훈 가족에게 피눈물 나게 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사업이다. 중단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했다. 강 시장은 ‘이미 진행 중인 사업이라 중단하기 어려운 점을 이해해달라’는 취지로 답신을 했다고 김씨는 전했다. 김씨는 이어 “정율성은 윤이상 같은 음악가가 아니다. 6·25 전범인 정율성을 위해 국민 혈세를 쓰는 건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광주 정신과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 20일 ‘정율성거리’에 조성된 방명록엔 정율성을 비난하는 글이 적혀 있다. 글씨체를 보면 한두명이 집중적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광주/이정용 선임기자
지역 정계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임중모 더불어민주당 광주광역시당 대외협력국장은 “윤석열 대통령이 낮은 지지율을 반등시키려고 때아닌 이념전쟁을 불러일으켜 광주시가 이념 갈라치기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게 유감스럽다”며 “글로벌 시대에 맞게 미래를 지향하는 게 옳지 않겠냐”고 되물었다. 이어 “정율성 기념사업은 노태우 대통령이 정 선생의 부인(정설송)을 초청해서 한-중 우호의 상징으로 삼은 게 시작이었고, 이어 김영삼 대통령 때는 정율성음악회를 열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 전승절 기념식에 참석해 정율성 곡이 연주되는 퍼레이드를 참관했다”며 “보수 정권이 먼저 정율성을 대중국 외교의 중요한 인물로 삼아 사업을 펼쳐왔다”고 꼬집었다. 국민의힘 광주광역시당에도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시민들은 어떨까?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만난 40대 남성은 “정율성의 잣대로 인물을 평가하려면, 박정희 대통령의 남로당(남조선노동당) 전력도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며 “이념 잣대가 불공정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반면 20대 남성은 “정율성 사업을 하면서 친북 전력을 쏙 빼놓고 소개했다. 정율성의 친북 전력을 시민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표지판 찾기 힘든 ‘윤이상기념공원’
2018년 3월 경남 통영의 한 남성이 통영국제음악당 뒤편에 있는 윤이상 묘역의 비석을 밟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김오복씨가 말한 윤이상의 고향 통영으로 향했다. 16일 오후부터 경남 통영엔 비가 내렸다. 통영국제음악당으로 갔다. 도남동 해변 언덕에 들어선 이 음악당에선 날이 좋으면 한려수도와 한산도를 볼 수 있다. 이곳에선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음악제로 평가받는 ‘통영국제음악제’와 젊은 음악가를 발굴·육성하는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가 열린다. 콩쿠르에선 임윤찬(피아노)·한재민(첼로) 등이 상을 받으면서 젊은 클래식 스타 탄생의 장이 되고 있다.
애초 이 음악당은 윤이상 국제음악당이란 이름이 붙을 예정이었으나, 2013년 개관될 때 통영국제음악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대북 강경책을 유지한 박근혜 정부 시절이어서 친북 논란을 빚는 윤이상 이름을 내건 음악당을 세우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 뒤뜰엔 윤이상 묘역이 있다. 2018년 독일에서 국내로 유해가 송환된 뒤 마련됐다. 생전에 “고향 바다를 다시 보고 싶다”던 윤이상의 뜻에 따라 묻힌 곳이다. 묘역 찾기는 쉽지 않다. 음악당 뒤뜰에 가린데다 이정표도 눈에 잘 띄지 않았다.
17일 오전에 찾은 통영시 도천동의 공원. 이곳도 ‘윤이상기념공원’으로 기획됐으나 2010년 3월 개관 당시 ‘도천테마파크’로 바꿔 개장했다. 윤이상 이름을 되찾은 건 2017년이었다. 같은 해 9월 통영시의회는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윤이상기념공원’으로 바꾸는 조례 개정을 했다. 하지만 공원에서 ‘윤이상기념공원’ 표지판은 찾기 힘들었고 인터넷 포털에서도 ‘도천테마공원’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곳에는 윤이상 전신상, 윤이상 생가터 표지석, 윤이상 음악 감상이 가능한 공중전화 부스, 윤이상의 독일 자택을 재현한 공간인 ‘베를린 하우스’ 등 여러 개의 윤이상 기념물이 있다.
여기서 만난 이중도 윤이상기념관 팀장은 “광주에서 정율성 논란이 일어난 뒤 한두통의 항의 전화를 받았으나, 이념 논란에 대해 대부분 시민은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 팀장은 그 이유에 대해 “2011년 ‘통영의 딸’ 사건으로 보수 언론의 집요한 비판을 받았는데, 아마 그게 ‘백신’으로 작용한 거 같다고 했다”고 말했다.
‘통영의 딸’ 사건은 통영 출신으로 1960년대 독일에 간호사로 파견된 신숙자씨와 독일 유학생이었던 오길남씨가 두 딸과 함께 1985년 월북하면서 벌어졌다. 1년 뒤 혼자 탈북한 오씨는 북한에 간 게 윤이상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2011년 오씨의 주장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신씨와 두 딸의 송환 촉구 운동이 일어났다. 윤이상 유족은 오씨를 사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으나 2013년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됐다.
통영에서도 이념전쟁이 꿈틀거리고 있긴 했지만 파고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배도수 통영시의원(국민의힘)은 지난해 12월 “윤이상기념관 명칭 변경과 관련해 시민 여론을 수렴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호응받지 못했다. 일부 보수단체는 지난 3월 윤이상 국제음악제가 열릴 때 펼침막을 내걸고 행사장 주변에서 시위했지만 시민 반응은 냉랭했다. 이날 오전 밀양버스터미널에서 만난 60대 시민은 “윤이상이고 뭐고, 경제가 지금 너무 안 좋다”며 “서민들을 위해 경제 살리기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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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공과 설명하면 스스로 판단”
경남 밀양시 내이동 김원봉 의열단장 생가터에 들어선 ‘의열기념관’. 연합뉴스
17일 오후 경남 밀양시 내이동 해천길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태극기와 함께 무궁화, 독립운동가를 그린 벽화 등 여러 장식물이 곳곳에서 보였다.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라는 문구도 볼 수 있었다.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을 연기한 조승우 배우의 대사였다. 글 아래에는 김원봉과 아내 박차정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의열단장이었던 김원봉은 물론 박차정도 의열단원으로 항일운동을 벌였다. 박차정은 유관순에 이어 두번째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추서받은 여성 독립운동가다.
이곳 김원봉의 생가터엔 의열기념관이 들어서 있고, 바로 옆에는 의열체험관이 나란히 서 있다. 의열체험관에서 해설사를 만났다. 중·고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다 은퇴한 뒤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한다고 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는 “최근 이념 논란이 불거지면서 ‘친북 인사 김원봉을 기념하는 게 맞지 않는다’는 한두통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 어떤 분은 1시간 넘게 이곳에 와서 김원봉을 욕하며 해설 일을 하는데 힘들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김원봉의 공과를 설명해드리면 스스로 판단하신다. 자신의 판단 기준에 따라 강요하지 않고 평가하시는 것 같다”고 했다.
의열기념관 앞에서 만난 중학교 3학년 강승희양은 “모든 사람은 잘한 일과 못한 일이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는 대부분이 하기 힘들었던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계셨다. 그런 분들은 존경받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같은 후손도 나라가 어려울 때 나설 것”이라고 했다.
이념전쟁 현장을 둘러보니 홍범도·정율성·윤이상·김원봉은 닮은 점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또는 독재 정권의 정치공작으로 조국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살아 있을 때는 돌아오기 힘들었고 죽어서 한참이 걸려 돌아온 뒤에도 공격을 받고 있다. 이념을 소재로 한 공격은 남북이 강경 대치를 벌일 때 더했다.
대전 광주 통영 밀양/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이념전쟁’ 공격받는 역사 인물
홍범도·정율성·김원봉·윤이상은?
홍범도(1868~1943)는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다. 평안남도 평양시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에 투신했다. 한일합병 이후 연해주와 중국에서 활동했고 1920년 6월 일본군이 독립군 본거지인 중국 지린성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홍범도는 독립군을 지휘해 치열한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뒀다. 그해 12월 발간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의 ‘독립신문’ 88호를 보면,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 157명, 중상자 200여명, 경상자 100여명, 독립군 피해는 전사자 장교 1명, 중상자 2인이라고 나와 있다. 봉오동 전투는 그때까지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보였다. 홍범도는 같은 해 10월엔 김좌진 등과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해 승리를 거뒀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홍범도는 1921년 러시아 땅 자유시(현 스보보드니)로 본거지를 옮겼고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에 따라 카자흐스탄에 정착했다. 말년에는 한인 극장(고려극장) 수위로 일하며 여생을 보냈고 조국의 광복을 확인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정율성(1914~1976)은 북한 군가(조선인민군 행진곡)와 중국 군가(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를 작곡한 음악가다.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서 태어난 그는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상하이에서 피아노·바이올린·성악을 배웠다. 1939년 ‘팔로군행진곡’을 발표했다. 정율성은 광복을 맞자 귀국한 뒤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북한 정권과 인민군을 찬양하는 곡을 여럿 작곡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한군 신분으로 참전했다가, 1951년 중국으로 넘어간 뒤 중국 국립교향악단에서 일했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의 협박을 받는 등 시련을 겪었으나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복권됐으며 베이징에서 숨을 거뒀다.
김원봉(1898~1958)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태어난 그는 3·1 운동 뒤 의열단을 만들어 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 통치기관 파괴 활동을 이끌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서 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948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북한에서 조선인민공화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쳤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 평안북도 전권대표로 후방에서 북한군의 군량미를 생산하는 일을 맡았다. 김일성과의 정치적 경쟁에서 패해 1958년 숙청돼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윤이상(1917~1995)은 작곡가이자 첼리스트다. 경상남도 산청군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자랐지만, 자기 고향을 충무(통영)라고 했다. 광복 뒤 통영에서 음악 교사로 있으면서 유치환·김춘수 등 통영의 예술인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때 통영의 많은 교가를 작곡했다. 고려대 교가도 그의 작품이다. 1956년 음악 공부를 위해 유럽으로 떠났으나,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이 주축이 돼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이 항의하자, 박정희 정권은 1969년 그를 특별사면으로 석방했다. 서독으로 귀화한 윤이상은 한국 입국이 금지됐고 베를린에서 숨을 거뒀다. 서독 귀화 뒤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했으며 김일성과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정혁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