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3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목숨을 잃은 희생자 가족이 가습기 살균제와 살균제 제조 기업에서 생산한 물건을 전시하고 있다. 이날은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에 대한 발표가 있은 지 11년이 되는 날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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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3단계 피해자’에게도 제조·판매사가 위자료를 배상해야 한다는 첫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1·2단계와 달리 3단계 피해자는 제품 사용과 폐 질환 발병 사이 인과관계가 낮다는 이유로 가해 기업이 책임을 외면해왔는데, 이번 판결로 피해자 구제 범위가 큰 폭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9일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가습기살균제 3단계 피해자 김아무개(71)씨가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사 옥시레킷벤키저와 한빛화학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양쪽 상고를 모두 기각해 원고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들 회사는 김씨에게 위자료 500만원과 지연손해금을 배상해야 한다.
김씨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옥시와 한빛화학이 제조·판매한 가습기살균제 ‘옥시싹싹 뉴(new) 가습기당번’을 사용하고 2010년 5월 폐 질환 진단을 받았다. 갈수록 병세가 더 악화하면서 2013년 5월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원인 불명의 간질성 폐 질환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질병관리청(당시 질병관리본부)은 2014년 3월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 질환 가능성이 작다’는 이유로 김씨에게 폐 손상 3단계(‘가능성 낮음’) 판정을 내렸다. 당시 3단계 피해자는 1·2단계와 달리 정부 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다. 2015년 법원에 소송을 낸 김씨는 1심에서 패소했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공동대리인단의 도움을 받아 항소했다.
2019년 2심 재판부는 “옥시와 한빛화학이 김씨의 질병이 가습기 살균제가 아닌 다른 원인으로 발생했다는 점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김씨를 비롯한 사용자들은 ‘인체에 무해하다’는 제품상 표시를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며 김씨 손을 들어줬다. 김씨와 업체 쪽 모두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다.
그사이 2017년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특별법’이 시행되면서 김씨는 정부 지원을 받는 피해자로 인정받았지만, 업체 쪽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특별법은 가습기살균제 노출 뒤 피해가 발생한 사실과 질환의 일반적인 역학관계만 확인되면 피해자로 인정하며, ‘인과관계 없음’을 증명할 책임은 가해 기업에 두고 있다. 특별법 제정 취지에도 불구하고 옥시는 1·2단계 피해자에 대해서만 배상 책임을 지고 나머지 피해자는 배상을 하지 않고 버텨왔다.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해 피해자의 증명 책임을 완화한 2심 판단을 확정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질병관리본부의 3단계 판정은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말단기관지 부위 중심 폐 질환 가능성을 판정한 것일 뿐”이라며 “손해배상 소송에서 가습기살균제 사용과 그로 인한 질환의 발생·악화에 관한 인과관계 유무 판단은 구체적 증명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전제로 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원고 대리를 맡은 이정일 변호사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건강상의 피해를 입은 사람에 대해 ‘다른 원인이 있었음’을 가해 기업이 증명하지 못한다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이번 대법 논리를 다른 피해자에도 적용하면 구제 범위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옥시가 다른 피해자들에 대해 소송전을 이어가지 않고 대법 판결 취지를 받들어 전향적 태도로 배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