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뼈와 함께 사지뼈, 그리고 고무신까지 드러난 충남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 산97번지 동막골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 더한문화유산연구원 제공
땅에 박힌 머리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큰 대(大)자로 누운 듯한 포즈가 처연했다. 처음엔 머리뼈 윗부분만 살짝 보였다. 조사원이 대나무칼로 주변을 조심스럽게 긁어내자 치아가 박힌 턱뼈가 나왔다. 조금 뒤엔 사지뼈의 윤곽이 지상에 드러났다. 팔뼈, 허벅지뼈, 정강이뼈, 그리고 신고 있던 고무신까지. 73년만의 세상 빛이었다. 땅 밖으로의 온전한 수습은 며칠 더 기다려야 했다. “어서 나를 꺼내달라”고 애원이 환청이 되어 들릴 것만 같았다.
1950년에 큰 전쟁을 겪었던 대한민국은 전국 방방곡곡 유해가 묻힌 나라다. 70년이 넘게 흘러 증언자들의 기억도 불분명하고, 개발로 지형이 변했다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온다. 지난 7일 찾은 충남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 산97번지 동막골도 어김없이 그 사실을 확인해주는 현장이었다.
마을 끝에서 야산 초입에 올라 산길을 5분간 오르자 둥근 평지가 나왔다. 오전 9시, 밤새 현장에 덮어놓은 방수포를 걷고 작업 준비를 하는 시간. 9명의 조사원과 인부들은 앉은 자세로 호미, 대나무칼, 가위, 솔 등 각종 장비와 도구를 이용해 유해를 좀 더 명확하게 노출시키거나 새 유해를 찾기 시작했다. 이날 2구가 새로 나왔다. 10월31일 첫 유해가 발견된 이래 도합 7구다. 이중 머리뼈와 사지뼈가 함께 나온 완전유해는 5구. 허벅지뼈나 치아만 나온 유해도 있다. 유해는 두 개의 구덩이를 따라 세로로 묻혀 있었다.
7일 오전 동막골 유해발굴에 참여한 조사원이 머리뼈가 드러난 유해 주변 땅을 대칼로 긁어내고 있다. 고경태 기자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은 아산에서만 다섯번째다. 2018년 2월부터 설화산, 탕정, 황골 새지기, 성재산에서 아산시 또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예산으로 발굴사업을 해왔다. 그동안 총 278구(설화산 208구, 황골 8구, 성재산 62구)가 나왔다. 이번 유해발굴은 동막골 한 곳만이 아니다. 사업주체도 하나만이 아니다.
동막골의 유해발굴은 아산시가 진실화해위로부터 1억원의 국고보조금을 교부 받아 진행하는 사업이다. 서원리 동막골에 이어 13일부터는 염치읍 백암리 49-1번지(옛 탕정면 용두1리)와 염치읍 산양리 588번지에서 희생자 흔적을 찾는다.
충남 아산시 염치읍 산97번지 서원리 동막골 유해발굴 현장. 7일 아침, 현장을 덮었던 방수포를 걷어내고 있다. 고경태 기자
충남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 산97번지 동막골 유해발굴 현장. 방수포를 걷은 뒤 발굴작업을 시작하기 직전이다. 고경태 기자
7일, 충남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 산97번지 동막골 유해발굴 현장에서 오전 작업이 시작됐다. 고경태 기자
진실화해위가 직접 유해발굴을 실시하기도 한다. 2023년 민간인 희생자유해발굴 사업으로 10월부터 전국 8곳의 현장에서 진행중인데, 지난 3월 성공적으로 발굴을 마쳤던 아산시 배방읍 성재산 교통호도 그 대상지 가운데 하나다. 3월에 했던 공수리 산110번지 바로 옆 산883번지로, 이곳에서도 7일 현재 17구의 유해가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10월25일 현장이 공개된 경기도 선감학원 유해발굴은 인권침해 사건으로는 발굴사업에 유일하게 포함돼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동막골에서 나온 유해들은 형태상 대부분 어른의 것으로 보였다. 아직 감식이 실시되지 않아, 성별이나 연령대는 알 수 없다. 유해와 함께 고무신 15쪽, 5전짜리 동전 2개, 탄두 1개, 탄피 2개도 나왔다. 탄피는 1942년 생산된 M1이었다. 아산시의 보조사업자로 지정돼 동막굴 유해발굴 책임을 맡은 재단법인 더한문화유산연구원의 조영선 팀장은 “10월23일부터 발굴을 시작해 현장의 윗부분에서 일주일간 헤매다 가까스로 아래쪽 지점에서 유해를 찾았다”고 말했다.
동막굴 발굴현장에서는 고무신 15쪽이 나왔다. 고경태 기자
7일 오전 새로운 머리뼈가 발견되는 순간. 동막골 발굴 책임조사원을 맡은 더한문화유산연구원 조영선 팀장이 머리뼈 하나를 찾은 뒤 주변을 대칼로 긁어내고 있다. 고경태 기자
아산에서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규모와 관련해서 2009년 1기 진실화해위 보고서는 “최소 800여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힌 바 있다. 1950년 9월 말부터 1951년 1월 초까지 부역혐의로 불법 처형된 이들이다.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는 아직 나온 바 없다. 2020년 아산시 전수조사 보고서는 “증언에 의해 확인된 부역혐의 희생자가 1190명이었다”고 밝혔다.
동막골에서 나온 이들도 부역혐의 희생자들로 보인다. 가해자는 치안대와 경찰로 추정되는데, 처형 장소가 마을 안에 있다는 것은 같은 마을 주민도 가해자의 일원으로 동참했고 마을 내 갈등구조가 학살과정에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을 드러낸다. 홍남화 아산유족회 부회장은 “동막골에서 1950년 10월 중순경 30~40명이 죽은 것으로 안다. 생존자와 유족들의 증언에 따라 유해매장지를 추정했다”고 말했다.
유해발굴에 참여한 인부들이 작업 시작 직전 함께 모여 현장관리 안전수칙을 보고 있다. 고경태 기자
2020년 아산시 전수조사에서 동막골 희생자로 확인된 이는 김동연(호적명 김광연), 김원규(이칭 김보연), 김원규의 모, 한규혁, 박봉산, 진병준, 진병준의 아들, 김정의, 이옥동, 신명옥(신명산), 이광열, 이광열의 처, 이광열의 딸, 이광열의 아들, 신대준, 신대준의 형, 민영수, 노천수 등 18명이다.
2022년 부경대학교 산학협력단이 낸 ’유해매장 추정지 실태조사 및 유해발굴 중장기 로드맵 수립 조사 용역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조사대상지 381곳 중 발굴가능지는 37곳으로, 이중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자 매장지는 36곳이다. 아산에서만 조사대상지가 35곳이었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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