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기후행동’ 학생들이 지난 2월3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인근에서 정부의 에너지 공공성 확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정책은 화석화한 법제가 아니다. 생명체와 같다. 태어나 자라고 바뀌며 소멸한다. 정책을 낳고 바뀌게 하는 요인은 무얼까? 인구, 기술, 기후 등 세상의 갖가지 변화다. 무엇보다 이들 변화가 빚어낸 숱한 문제, 특히 삶의 질곡이다.
국가와 사회, 정책결정자를 비롯한 각 구성원이 품은 가치 또한 정책의 형성과 변화를 강제하는 핵심 요인이다. 가끔 정책은 “가치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만 세상에 그런 정책은 없다.
정책은 오히려 가치의 산물이다. 가치는 정책을 선택하고 결정한다. 예컨대 지하철이나 버스에 별도의 표시로 만들어진 노약자 좌석은 경로와 사회연대란 가치에 따른 정책적 선택의 결과다.
정치권력은 무릇 정책을 통해 가치를 달성하고자 한다. 때로는 정책을 앞세워 특정 가치를 부정한다. 정책을 논할 때, 가치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결정적 이유는 정책이 한 사회와 구성원들의 가치를 뒤바꾸거나 병들게 하는 데 있다.
윤석열 정부의 정책 행보는 정책과 가치의 관계를 새삼 숙의하게 한다. 윤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지속가능한 복지국가’를 내세웠다. 정부 출범 뒤에도 ‘국정과제’에서 앞세운 데 이어 사회보장전략회의 등 여러 자리에서 지속해서 이를 복창했다.
윤 대통령은 이런 국정 청사진을 주창하면서 단 한 번이라도 복지국가가 추구하는 기본적인 정책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곱씹어 보았을까?
기실 복지국가의 역사는 가치 추구와 실행의 정책사다. 그렇다면, 윤 정부를 비롯한 역대 정부가 저마다 내세운 복지국가의 정책가치는 무엇일까? 필자는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한 공공성을 핵심으로 꼽는다. 공공성은 “사적인 것(the private)과 구분되는 공동체(common)의, 공동의(public), 널리 공개된 성질”이라는 등 다양하게 정의되지만 한마디로 “공동의 선, 공익을 우선시하는 행동성향”을 가리킨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이를 권리(사회권)로 보장한다”는 복지국가의 이상은 저절로 이뤄질 수 없다. 그것은 “모두 함께(共) 합의하고 달성해야 할 공(公)적인 어떤 가치”, 곧 공공성이 널리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현실이 될 수 있다.
북유럽 복지국가는 그 실체다. 최희경 경북대 교수는 ‘북유럽의 공공가치’란 저서에서 스웨덴 등 북유럽 나라의 의료와 교육 정책 현장에서 이 공공성이 어떻게 복지국가의 정책 토대로 작용하는지를 생생히 보여주었다. 복지국가 북유럽은 “단순히 법과 정책을 잘 만들거나 정치인이나 기업인 등 특정 집단의 도덕성이 우월”해서가 아니라 의료재정의 85%, 교육재정의 97%를 정부가 부담하면서도, 개개인이 자율성을 갖고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평등을 중시하는 보편주의와 관용의 가치를 갖추도록 하는 것, 즉 “사회가치와 개인가치가 견고하게 결합한 공공가치”로 지탱된다는 게 그의 논지다.
윤석열 정부의 복지국가 비전과 정책을 공공가치의 시선으로 보노라면 모순적이고 병리적이다. ‘가치전도’와 공공에 대한 적대감을 빈번히 마주한다. 복지국가를 비전으로 내세우면서 시장근본주의를 지향하고 시장화를 외치는 괴이함에다, 경제, 복지, 교통, 노동, 교육, 환경, 에너지, 미디어 등 우리 사회의 갖가지 분야에서 추진되는 정책에서는 실상 ‘공공성의 역행’을 확인할 뿐이다. ‘공공기관 혁신’은 과도한 복리후생을 조정하고 공공과 민간의 협력 강화를 말하지만, 인력과 예산에서 공공성을 심대하게 낮추는 구조조정 조처에 가깝다. 재생에너지 분야에선 민자발전 모델이 확산하면서 에너지 전환은커녕 이윤에 눈이 먼 사업자들에 의해 산과 농지, 바다가 파괴될 우려를 심화시킨다.
더는 민영화할 것도 없는 보건의료 영역에선 규제 개혁이란 이름으로 공공이 소유한 시민의 건강정보를 영리를 추구하는 민간자본이 더 쉽게 활용하도록 하는 움직임이 지속된다. 장기요양 영역에선 어떤가? 공립요양시설 확충보다는 요양시설 임차 허용을 통해 민간 보험사의 진입장벽을 낮추어 주려는 시도가 추진되고 있다.
이처럼 뭇 영역에서 나타나는 ‘친자본 반공공’의 정책 움직임은 가뜩이나 협소한 우리 사회의 공공성과 공공가치의 공간을 더욱 압착한다. 그 빈자리엔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해는 사회화하는” 이익지상주의, 과거 성장지상주의 정책이 낳아 괴물처럼 부풀린 전도된 가치가 독가스처럼 파고들 것이다.
윤 정부의 ‘반공공 정책’을 두고서 몸서리치는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이런 흐름이 비단 윤 정부뿐만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은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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