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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살인예고’에 손배 소송…‘본때 보여주기’보다 필요한 것 [뉴스AS]

등록 2023-09-21 06:00수정 2023-09-21 19:44

삼성과 엘지(LG)의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는 대구 야구장에서 ‘흉기 난동’을 부리겠다는 예고 글이 올라온 지난달 5일 오후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경찰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삼성과 엘지(LG)의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는 대구 야구장에서 ‘흉기 난동’을 부리겠다는 예고 글이 올라온 지난달 5일 오후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경찰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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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법무부가 온라인상에 살인예고 글을 올린 작성자 최아무개(29)씨에게 4370만원 규모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었습니다. 지난 7월 최씨가 ‘신림역 2번 출구 앞에서 칼 들고 서 있다. 이제부터 사람 죽인다’고 글을 올려 사이버수사팀과 경찰기동대 703명이 투입되는 등 경찰력 낭비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살인예고 글 작성자들은 이미 형법상 위계공무집행방해 또는 협박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데요. 법무부는 이들에게 “형사책임뿐 아니라 민사책임까지 철저하게” 묻겠다는 방침입니다.

그동안 112나 119에 건 ‘허위신고’ 때문에 국가가 개인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례는 제법 있었습니다. 보름 동안 112에 331번이나 허위 신고를 한 50대 남성이 벌금형과 함께 경찰에 약 580만원을 배상한 사례가 있고요. “청와대를 공격하려고 12명이 중국을 거쳐 넘어왔다”는 허위신고로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을 불러온 40대 남성은 징역 6개월에 더불어 340여만원을 경찰에 배상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온라인에 올린 글 때문에 경찰력이 낭비됐다는 민사 소송은 전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법무부 관계자는 “아직 관련 판례는 없고, 2012년부터 허위신고로 인한 경찰 출동에 대해서는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례가 있긴 하다”며 “정식으로 법원 판단을 받아보려 소를 제기했다”고 밝혔습니다. 승소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소송이 바람직할까요? 이 소송이 기대하는 효과는 무엇일까요? 법조계에서는 비판적인 의견이 많습니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이론상 불가능하진 않지만 이런 논리면 모든 범죄자에게 다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셈”이라며 “국가 공권력의 역할은 범죄를 예방하는 것인데 과연 이 사건에서 경찰이 출동한 것을 두고 국가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살인 예고’가 속출하고 있는 지난달 7일 대구 중구에서 한 시민이 살인 예고를 정리해 알려주는 누리집에서 실시간 예고 글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전국적으로 ‘살인 예고’가 속출하고 있는 지난달 7일 대구 중구에서 한 시민이 살인 예고를 정리해 알려주는 누리집에서 실시간 예고 글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쉽게 말하면 법무부는 최씨가 ‘진짜 흉악범’이 아닌데 경찰이 괜히 출동했다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괜한 출동’과 ‘실속 있는 출동’의 경계는 모호합니다. 만일 작성자가 단순 장난이 아니라 정말 살인할 마음을 먹고 글을 올렸다가 경찰 출동으로 단념한 것이라면, 이미 경찰은 ‘범죄 예방’이라는 제 할 일을 다 한 것 아닐까요? 법무부 논리대로라면 살인대상을 특정하거나 범행도구를 준비하는 등 살인의 구체적 준비행위가 드러난 ‘살인예비범’에게는 민사책임이 없고, 살인예고만 한 ‘협박범’은 민사책임이 생기는 셈입니다.

승소 가능성을 떠나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되는 소송이라는 비판도 나옵니다. 재심 전문 변호사인 박준영 변호사는 “우리 공동체의 기본적 도덕과 배려를 기르는 일은 소송으로 해결할 수 없다. 범죄 예방을 위해 국가 역량을 어디에 투입할지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국가가 어느 개인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태도로 민사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우려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소송이 한 개인을 더 큰 절망에 빠트려 사회적으로 회복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법리적으로 권리가 성립한다 해도 행사할지 말지는 여러 사정을 감안해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도심에서 흉기 난동 사건이 잇따라 벌어진 터라 정부로서는 시민들의 불안감을 조성하는 살인예고 협박을 차단하는 것이 물론 중요할 것입니다. 검경은 이들에게 살인예비나 협박 등의 혐의를 적용하고 있지만, 구체적 준비행위가 없고 대상도 특정되지 않은 범죄 예고는 혐의 입증이 쉽지 않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유행처럼 번지는 살인예고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승산도 실속도 없는 민사소송보다 ‘공중협박죄’ 신설이 우선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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