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보라 감독·다나카 켄 결혼식 수어·한국어·일어·영어 4개 언어 공존 농인 부모님 위해 아이디어 내 “이런 결혼식 세상에 알리고파”
영화감독인 이길보라(오른쪽)씨와 다나카 겐의 결혼식이 열린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에서 이 감독이 수어로 내빈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날 결혼식은 이 감독의 모어인 수어와 함께 한국어 음성이 동시에 나오고, 일본어 통역이 뒤따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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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의 막이 오르자 사회자가 수어를 시작했다. 사회자는 하객들에게 신부 이길보라(보라)씨와 신랑 다나카 켄을 ‘반짝이는 박수’로 맞이해달라고 했다. 반짝이는 박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농인들을 위한 ‘보이는 박수’를 의미한다. 수어와 함께 한국어 음성이 거의 동시에 나왔고, 일본어 통역이 뒤따랐다. 하객들은 양손을 올린 뒤 손바닥을 좌우로 흔들며 반짝이는 박수로 호응했다. 사회자는 “오늘 이 자리는 두 사람의 고집과 의도로 보라의 모어이자 첫번째 언어인 수어로 진행된다”며 “이것이 두 사람이 만든 새로운 형태의 소통방식이자 가족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17일 영화 감독인 보라와 켄의 결혼식이 열린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한옥(무계원) 마당에는 4가지 언어가 공존했다. 보라 부모님의 모어인 ‘수어’, 보라의 음성 언어인 ‘한국어’, 켄과 켄 부모님의 음성 언어인 ‘일본어’ 그리고 두 신랑 신부가 소통하는 ‘영어’까지 여러 형태의 의사소통이 교차했다. 이중 가장 기본이 되는 언어는 수어였고, 한국어→일본어 순으로 통역이 이뤄졌다. 사회자를 포함해 2명의 수어통역가와 한국어 및 일본어 음성 통역가 등 4명이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쉴 새 없이 소통의 공백을 메웠다.
1차 언어가 수어인 결혼식은 보라의 아이디어였다. 보라는 농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를 뜻하는 코다(CODA·Children of deaf adult)다. “손으로 옹알이를 하고, 눈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는 보라에게 수어는 부모로부터 받은 소중한 유산이면서 핵심적인 정체성이다. 보라는 이런 가족사를 2015년 다큐멘터리 영화(반짝이는 박수소리)로 풀어내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보라는 지난 13일 한겨레와 만나 “99%의 결혼식은 음성 언어로 진행된다. 이런 결혼식도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면 어떨까 생각했다”며 “엄마 아빠한테, 정말 일생 일대에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켄도 보라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켄에게 장애란 “자연스러운 것(natural)”이고, 따라서 수어 결혼식도 결코 “특별하지 않은 것(nothing special)”이었다. 켄은 “교사였던 어머니는 장애인 학생들을 가르치며 겪은 이야기를 우리와 나눴고, 장애에 대해서 편견을 갖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말했다. 켄은 이날 결혼식에서 보라 부모님을 바라보며 감사 인사를 수어로 전하기도 했다.
결혼식에선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 한마디에 진심을 담는 모습이었다. 보라의 어머니가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내가 농인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하시면 어쩌나 걱정이었는데, 켄의 부모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맞아주셨고, 둘의 결혼을 축복해주셨다”며 수어로 덕담을 건네는 순간 농인 하객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음성 통역이 뒤이어 나오면서 식장 전체는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보라와 켄은 2016년 한국에서 영화를 매개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안 돼 사랑에 빠졌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보라, 중학교를 자퇴한 켄 모두 제도권 교육을 거부하고 ‘길’에서 배움을 찾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이날 결혼식도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은 채, 보라와 켄의 방식대로 치러졌다.
심우삼 기자 wu3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