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춤추며 싸운” 일농 김준기 선생을 기리며
상계동 빈민촌서도 사람 농사지어
“조직되지 않은 농민은 맞설 수 없다”
맨 앞에서 싸우며 끝까지 사람 챙겨 ‘사형선고’ 췌장암에도 의연했지만
“춤추며 싸우다 죽을 줄 알았는데…” 김준기 선생과 나는 오래된 인연이 있다. 1958년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선생은 서울시농촌지도소에 근무했다. 선생은 그때 이미 사람 농사를 지으려는 결심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4-H운동이 농촌에 파고들 때 압구정 우리 동네에도 4-H구락부가 조직됐다. 동네 남녀 선배들을 조직하고 교육했던 분이 바로 김준기 선생이다. 나는 나이가 어려 당시 그곳의 대상자는 아니지만 자전거를 끌고 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달려 젊은 농민들을 만나곤 했던 김준기 선생을 기억한다. 물론 나중에 이야기 퍼즐을 서로 맞추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선생의 사람 농사는 평생을 걸쳐 이어지는 끈질김이 있다.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선구자이며 여성농민운동의 대모라 일컬어지는 김영자 선생과 결혼 뒤 상계동 빈민촌에서 지은 비닐하우스 농사도 사람 농사에 다름 아니다. 신구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후학들을 지도했고, 각 지역의 농민교육에도 적절한 사람들을 추천하고 당신이 직접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4-H가 관변화되자 ‘춤추며 싸우는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가톨릭농민회 결성에 뛰어든다. 가톨릭농민회 경기지회를 만들고 지회장을 맡기도 했다. 선생의 논리는 분명했다. 조직되지 않은 농민은 정책의 부당함에 맞설 수 없다. 따라서 농민 다수를 조직화하고 그 조직을 교육을 통해 의식화시켜야 한다고 했다. 1989년 사람 농사의 연장 선상에서 ‘함께하는 농민’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그때 나는 그 광고를 보고 일년 치 구독료를 납부했다. 그러나 함께하는 농민은 5월 첫 호를 내고 폐간됐다. 첫 호 특집으로 ‘북한 농민 어떻게 사는가’라는 글을 실었다. 그로 인해 선생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의 지론은 갈라진 우리나라가 북쪽과 남쪽의 자연환경이 퍽이나 달라 서로 보완적 관계가 된다고 본 것이다. 편중된 농업문제를 풀어내려면 통일이 돼야 하는데 농민들이 이북의 농업 상황을 잘 모르기에 이를 소개함으로써 노둣돌이 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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