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19일 오후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유우성(왼쪽), 유가려씨가 자신들에게 가혹행위와 허위진술을 강요한 혐의를 받는 국정원 직원들의 1심 속행 공판에 앞서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에서 나고 자란 화교 유가려(당시 25살)씨는 먼저 탈북한 오빠 유우성씨를 따라 2012년 10월30일 한국에 입국했다. 화교 신분을 감추고 국가정보원 합동신문센터에 들어갔다. “엿새째부터 국정원 직원들의 ‘가혹행위’가 시작됐다. 머리채를 잡히고 주먹으로 맞으며 화교 신분을 인정했다. 구타당하며 ‘오빠 간첩이지’라는 질문을 수없이 들었고 결국 허위 자백을 했다.” 유가려씨가 말하는, 국정원과 검찰의 조작으로 결론 난 ‘유우성 간첩 조작 사건’의 출발점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2단독(이승호 판사)은 가혹행위로 유가려씨에게서 허위 자백을 받아낸 혐의로 기소된 국정원 직원 2명에게 지난 9일 무죄를 선고했다. 얼떨떨한 얼굴로 법정을 빠져나온 유우성씨는 “판사가 제 사건 판결문을 안 읽어봤거나 무시한 모양”이라며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 ‘171일 불법구금’ 정말 행정조사 맞나요?
13일 한겨레가 국정원 직원 무죄 판결문을 분석해보니, 대법원에서 확정된 유우성씨 간첩 무죄 판결과 배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판사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은 당시 국정원 합신센터 소속으로 탈북자 행정조사를 담당했고, 대공 혐의를 직접 수사하지는 않았다”며 “유가려에게 폭행·협박을 가하면서까지 국가보안법 위반 관련 진술을 받아낼 동기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유가려씨에 대한 조사가 ‘행정조사’ 이상이었다는 점은 이미 인정된 사실이다. 2014년 4월 서울고법은 유우성씨의 간첩 혐의 무죄를 선고하며 “(동생)유가려가 중국 국적임이 밝혀진 이상, 그 이후 어떤 조사도 행정조사보다는 보안법 수사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사실상 유가려씨가 ‘대공 수사’를 받았다는 뜻이다. 국정원은 ‘화교 신분’ 유가려씨를 추방하지도 않고 영장도 없이 171일이나 불법 구금했는데, 이 과정을 단순 ‘행정조사’로 본 셈이다.
유가려씨가 보안법 위반 혐의의 ‘사실상 피의자’였다는 점은 유우성씨 사건에서 무척 중요한 사실이었다. 당시 법원이 “실질적 피의자 지위에 있었다고 볼 유가려의 진술서는 피의자 진술서 성격을 가지고, 진술거부권을 고지하지 않고 작성된 위법수집증거”라며 “오빠는 간첩”이라는 유가려씨의 진술을 배척했기 때문이다. 유우성씨의 간첩 혐의를 벗겨준 이 결정타는 2015년 10월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 잊고 싶은 10년 전 일…정확히 기억하나요?
10년 전 합신센터에서 유가려씨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독방에 감금됐고, 외부와의 연락이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10년 전 기억에서 드러난 작은 헷갈림을 이 판사는 ‘무죄’ 근거로 삼았다. 2013년 유우성씨 사건 때 “비타500병을 머리로 깨서 피를 보이든지 오빠가 (간첩이) 아니라고 증명해야겠다 생각했다”고 유가려씨가 말했는데, 2020년엔 “우유 2병”, 2021년엔 “두유병 같은 유리병”으로 말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유가려씨 변호인단은 극도의 공포에 시달렸던 10년 전 경험에 대한 진술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양승봉 변호사는 “유가려씨가 센터에서 나왔을 때 트라우마 탓에 미시적으로 일관성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국정원에서 나온 날부터 지금까지 ‘국정원에서 맞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며 “판사는 재판 과정에서 거짓으로 드러난 국정원 해명은 보지 않았다”고 했다.
■ 왜 7년 전에는 말 안 했나? “안 물어봤잖아요”
유가려씨에게 유리한 진술은, 맥락이 다른 동일인의 옛 진술 때문에 탄핵당하기도 했다. 유가려씨와 함께 합신센터에 있었던 ㄱ씨는 2020년 재판에 나와 “유가려에게 상처는 없었는데 뺨이 울긋불긋했다. ‘맞았어?’ 물으니 눈을 쓱 내리깔길래 속으로 ‘때리나?’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ㄱ씨가 2013년 다른 질문에 대한 한 답변 중 “상처가 있다거나 움직이는 게 불편해 보이진 않았다”고 한 대목을 끌어와 ‘7년전과 다른 진술’이라며 ㄱ씨의 2020년 증언을 믿을 수 없다고 봤다.
양 변호사는 “7년 전 증인신문에서 쟁점도 아니었던 몇 줄의 증언을 따와 이번 증언을 날려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재판에서 새로운 진술을 꺼낸 ㄱ씨는 “왜 2013년에는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때는 안 물어봤잖아요”라고 답했다.
■ “아무도 처벌 받지 않으면 조작 간첩 또 나온다”
이미 유우성씨는 2015년 간첩 혐의에 대해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 지었다. 간첩 증거를 조작한 국정원 직원들도 일부 처벌받았고, 국정원이 유가려씨의 변호인 접견을 막은 사실도 인정돼 국가 손배소에서도 승소했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유가려씨가 왜 거짓 자백을 했는지’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공백으로 남게 됐다.
유우성씨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솔직히 이제 이 사건을 외면하고 싶다. 나는 이미 무죄를 받았고 이 사건이 어떻게 되든 내 생활에 지장은 없다”면서도 “하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은 채로 놔두면 국정원에서는 또 다른 조작 사건이 나온다. 윗사람이 강압적으로 조작 지시를 내려도 수사관들이 거부할 수 있도록 할 유일한 방법은 피고인 두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혜 기자
godo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