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김재림 할머니.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사건처리 지연으로 인한 불편을 호소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도 절감했습니다.”
서경환 신임 대법관은 7월19일 취임사에서 재판 지연 문제를 언급했다. 그는 인사청문 과정에서도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오랜 격언을 강조했다.
김재림(93) 할머니에게는 사법부의 ‘신속한 정의’가 절실했다. 그는 1944년 5월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동원돼 노역에 시달렸지만 해방 뒤 임금을 받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2014년 2월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2017년 8월 광주지법(1심)에 이어 2018년 12월 광주고법(2심)도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대법원은 4년7개월째 결론을 내지 않고 심리를 이어갔다.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던 김 할머니는 지난 30일 숨을 거뒀다.
1일 기준 일제 강제동원 관련 손해배상 소송 9건이 대법원에 4년 넘게 계류 중이다. 그사이 ‘지연된 정의’를 기다리던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김 할머니와 함께 미쓰비시중공업 소송에 나섰던 양영수 할머니가 지난 5월 94살로 숨졌다. 지난해 10월에는 후지코시강재를 상대로 낸 소송 결과를 끝내 보지 못하고 김옥순 할머니가, 2019년 10월에는 이춘면 할머니가 별세했다. 모두 1·2심에서 승소했지만 가해 기업의 사과나 배상을 받지 못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이상갑 변호사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이미 원고 승소 판결한 것과 쟁점이 다르지 않아 (확정 판결이) 늦어질 이유가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앞서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한 강제동원 사건들도 ‘재판 지연’을 겪었다. 이춘식 할아버지 등 강제동원 피해자 4명은 소송을 제기한 지 13년8개월 만인 2018년 10월에야 전원합의체 재상고심으로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 할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원고들은 모두 별세했다. 이 사건은 2012년 5월 소부 상고심에서도 원고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됐지만 ‘사법농단 사건’에 연루돼 재상고심 결론이 미뤄졌다는 의혹이 있다.
사법농단이란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시절(2011년 9월~2017년 9월) 사법부 행정 업무를 맡는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재판에 개입하고 법관의 독립을 침해한 사건을 말한다.
대법원 확정판결이 지연되면서 하급심도 혼란을 겪고 있다. 대법원에 계류된 9건 말고도 1·2심에서 심리 중인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은 50여건에 달한다. 소송 대부분이 2015년 이후 제기된 탓에 하급심에서는 소멸시효 판단이 엇갈리는 게 문제다. 민법은 △손해를 알게 된 날로부터 3년 △불법 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이 지나면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한다고 규정한다. 다만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다면 이 사유가 해소된 때가 소멸시효를 계산하는 출발점(기산점)이 된다. 이 날짜가 2012년 5월24일 소부 상고심인지, 2018년 10월30일 전원합의체 재상고심인지를 두고 하급심의 판단이 제각각인 상황이다.
일부 하급심은 “2018년 10월 전원합의체(재상고심) 판결을 통해 피해자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장애사유가 해소됐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힌 반면, 또 다른 하급심에서는 “2012년 5월 소부(상고심)를 기산점으로 3년이 지났으므로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판단했다. 앞서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 때 소멸시효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김정희 변호사는 “사건을 맡으면 승소 판결을 바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빠른 판결’이 절실하다”며 “소멸시효 기산점에 대해서도 대법원이 판단을 해줘야 하급심에서 혼동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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