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아침 7시40분께 40여명의 사람들이 ‘다이어트약 성지’로 유명한 서울 구로구 ㄱ의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전날부터 줄을 서면서 밤을 새거나, 새벽 이른 시간에 와서 줄을 섰다고 했다. 고병찬 기자
지난 27일 아침 7시30분 서울 구로구의 한 비만클리닉 의원 앞. ‘다이어트약 3대 성지’ 중 한곳으로 꼽히는 이곳엔 40여명이 번호표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오랜 기다림에 대비해 캠핑 의자를 가져온 사람부터 돗자리를 깔고 롱패딩을 덮은 채 자고 있는 사람까지 있었다. 병원 앞엔 당일 대기 가능한 인원 안내와 함께 대기표 순번에 따라 대기 장소를 설명해 놓은 안내문도 붙어 있었다.
전남 순천에서 와 전날 밤 10시부터 줄을 섰다는 ㄱ(42)씨는 “건강검진에서 살을 빼지 않으면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고 해서 왔다”며 “어젯밤 10시에 도착했지만 이미 먼저 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했다. 경기 파주에 사는 김아무개(24)씨는 전날 친구 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날 새벽 5시30분부터 줄을 섰다. 김씨는 “직장을 다니는데 운동 갈 시간이 없어 결국 약을 먹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3년째 이 건물에서 일하는 경비노동자 안영진(59)씨는 “아직 추워서 사람이 좀 적은 편이다. 여름이 되면 다른 업체들로부터 ‘통행로가 없다’며 항의가 들어올 정도”라고 설명했다.
수년째 ‘살을 잘 빼주기’로 입소문이 난 유명 비만클리닉 앞이 ‘입장 전 미리 줄서기’(오픈런) 행렬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이런 병원들은 각종 약을 조합해 처방하는 것이 노하우라고 강조하지만, <한겨레> 확인 결과 전문가들은 처방 약들이 가져올 정신적·신체적 부작용이 매우 위험하다며 심각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27일 오후 서울 구로구 ㄱ의원에서 ‘다이어트약’을 처방받은 한 여성의 처방전. 고병찬 기자
ㄴ씨는 이날 병원에서 56일치 다이어트약 20만원어치를 처방받았다. ㄴ씨의 처방전에는 식욕억제제 외에도 항우울제, 항전간제(뇌전증 발작 치료 약), 당뇨약, 변비약 등 13가지 종류의 약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하루 세 차례 먹어야 하는 약만 6가지였다.
김이항 약사(경기도마약퇴치운동본부)는 “식욕억제제(디에틸프로피온)와 같은 의료용 마약류를 포함해 항우울제 등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줘 우울감, ‘자살 충동’ 등 정신과적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약들이 포함돼 있다”며 “식욕억제제 외 약들은 (약의 기존 목적이 아닌) ‘부작용’으로 식욕억제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사용되는 약들은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채 쓰여, 심하면 중독 증상을 보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지난 4일 제주 서귀포경찰서는 마약류에 해당하는 식욕억제제를 과다 복용하고 차량 6대를 들이받은 혐의로 20대 여성을 송치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마약류 의약품이 오남용되는 것을 강하게 경고한다. 김율리 서울백병원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외모지상주의 사회 풍조, 의료인의 윤리 의식 부재, 의료당국의 허점 등이 복합적으로 약물 오남용을 일으키고 있다”며 “식욕억제제와 같은 마약류 의약품은 체질량지수(BMI·몸무게를 키의 제곱으로 나눈 값) 30 이상의 고도비만 환자에 한해, 운동이나 식이요법으로 감량이 되지 않아 건강에 문제가 생길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자료를 보면, 2021년 기준 의료용 마약류에 해당하는 식욕억제제 처방 환자 수는 124만8146명(처방 건수는 586만7465건)이다. 지난해 식욕억제제의 오남용 조치 기준을 벗어나 처방한 의사도 1129명이었다. 의사가 식욕억제제와 같은 마약류 의약품을 다른 목적으로 처방하거나 정해진 용량보다 과잉 투약하면 징역 2년 이하 또는 벌금 2000만원 이하로 처벌받을 수 있다. 김이항 약사는 “비만클리닉에서 처방되는 약들은 대부분 ‘비급여’라 오남용해 처방하더라도 당국의 감시망을 피해 나갈 가능성이 크다”며 “의료인들의 자정 노력에 더해 비급여 약물 처방에 대해서도 정부의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난 27일 아침 7시40분께 40여명의 사람들이 ‘다이어트약 성지’로 유명한 서울 구로구 ㄱ의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해당 건물 경비노동자 안영진(59)씨는 “여름에는 7개 줄로 120명가량이 모두 들어차기도 한다”고 했다. 고병찬 기자
고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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