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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한국도 양부모도 우릴 버렸다”…국외 입양인 5명의 ‘팔린 삶’

등록 2023-04-29 07:30수정 2023-04-30 12:04

[한겨레S] 커버스토리
2차 대전 이후 국제 입양된 아동 45만, 그중 25만명이 한국인
“백인 비싸고 흑인 싫어 아시안 구매”…학대·트라우마 지속된 일상
“우리는 범죄 피해자”…2025년 아동 송출 멈추겠다는 정부 비판
국외 입양 70주년을 맞아 한국을 찾은 입양 예술인들이 지난 20일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 관훈동 마루아트센터에서 <한겨레>와 집담회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국외 입양 70주년을 맞아 한국을 찾은 입양 예술인들이 지난 20일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 관훈동 마루아트센터에서 <한겨레>와 집담회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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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가 2025년까지 ‘헤이그 국제 아동입양 협약’을 비준하겠다고 한 보도를 봤다. 우리는 당신들이 그걸 비준하고 새로운 시간을 시작하기를 기대하면서 35년(1988년 서울올림픽 기준)을 기다렸다. 지금도 학대받는 아이들이 있다. 당장 그런 행동을 멈추게 해야 한다. 왜 우리가 이런 낡은 시스템이 2년이나 더 지속되는 걸 두고 봐야 하고, 왜 아이들이 2년이나 더 짓눌려야 하나? 한국 정부는 최대한 빨리 협정을 비준해야 한다.”

메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호소했다. 한국 정부는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1996년까지 국외 입양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강국이 됐다고 자부하지만 여전히 ‘아동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떠안고 있다. 지금도 한 해 200명 이상의 아이들이 국외로 입양된다. 정부는 아이가 태어난 나라에서 자랄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고, 불가피하게 나라 밖으로 보낼 경우 이를 국가가 책임지도록 한 ‘헤이그 국제 아동입양 협약’을 오는 2025년까지 비준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국외 입양 중단까지 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대한민국이 국외 입양을 시작한 지 70년을 맞았다. 박찬호 ‘해외입양인들과 함께하는 문화예술협회’(KADU·카두) 대표는 “학자들은 관련 서류가 남아 있는 입양인 18만명, 서류 확인이 안 된 이들까지 한국 아동 25만명이 국외 입양된 것으로 추산한다. 2차 세계대전 뒤 전세계에서 생겨난 45만명의 입양인 가운데 절반이 넘는 규모”라고 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국땅으로 ‘송출’된 입양인 상당수는 차별과 학대를 당했다. 성장한 입양인들은 이제 정부에 진상 조사를 요구한다. 2022년 국외 입양인 372명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자신의 입양 과정 등에 관련해 인권침해 여부를 조사해달라고 했다. 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이들 가운데 34명에 대한 조사 개시를 결정했다.

국외 입양 70년을 맞아 카두가 주최한 ‘대동제’에 많은 입양인이 참여했다. 카두의 협조를 얻어 이들 가운데 5명을 한자리에 모았다.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마루아트센터. 자신의 작품이 걸린 전시장에서 숙(네덜란드·연극 제작자), 기무라 별(벨기에·페미니스트 예술가), 정 린 스트란스키(미국·비디오 예술가) 예술가 3명과 메리 바워스(미국·먹기대회 선수), 은혜 김(미국·침술사)은 입양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되짚었다. 한국말을 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대화에선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가 느껴졌다.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에게 뼈아픈 말도 남겼다.

‘해외입양인들과 함께하는 문화예술협회’가 지난 22일 서울 삼성동 민속극장 풍류에서 연 대동예술제에서 입양인들과 시민들이 촛불을 켜고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해외입양인들과 함께하는 문화예술협회’가 지난 22일 서울 삼성동 민속극장 풍류에서 연 대동예술제에서 입양인들과 시민들이 촛불을 켜고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싸고 빠른 비행기 아이들’

세계 최대 입양아 송출국, 대한민국이 보낸 ‘싸고 빠른 비행기 아이들’은 머나먼 이국땅에서 차별과 학대에 부닥쳤다.

메리 “길을 갈 때 눈 흘김, 입양아라는 수군거림을 날마다 듣고 살았다. 영어를 잘 못하는 어린 시절엔 놀이터에서 신체적 괴롭힘을 당했다. 아주 비열했다. 어른이 될 때까지 멈춰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무라 “1980년대 벨기에에 한국계 입양인은 거의 없었다. 일자리를 찾으러 가면 ‘아시아 사람은 원하지 않는다. 차이니즈 레스토랑에 가 보라’고 했다. 허드렛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욕하고 싶을 때는 중국어로, 칭찬할 땐 일본어로 나를 대했다.”

기무라는 일본계 혼혈이다. 그는 벨기에에서 한국인 입양인 단체를 조직해 입양인 권익을 위해 싸워왔다. 현재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퀴어와 페미니스트 예술가로 활동한다. 숙은 더 처절한 경험을 털어놨다.

“난 1970년대 네덜란드로 입양됐는데, 그곳에선 앞선 입양 부모들이 입양인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편지로 적어 전해 주는 게 일종의 프로토콜이었다. 편지엔 ‘한국 성은 제거하고, 쌀밥도 주지 마라. 한국어로 말하면 벌을 주라’고 썼다. 양부모는 나를 백인으로 만드는 게 올바른 길이라고 믿었다. 수술로 내 눈동자가 파란색이 되게 하려고 애썼다. 백인처럼 피부가 하얗게 보이도록 박박 문질러 씻겼다. 이건 사적인 특별한 상황이 아니다. 프로토콜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이런 일을 겪었고, 나보다 더 심한 경우도 많았다.”

메리 “내 양부모 가족들은 자신이 인종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런 (인종주의적) 행동을 지속했다. 내 양부모에게 그게 선한 것이고, 그렇게 다뤄야 한다고 조언하는 시스템이 더 문제였다. 난 그런 걸 막을 수 없었다.”

“메리가 말한 것처럼 그들은 자신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애는 이렇게 다뤄야 해’, ‘잡고 발로 차 버려’ 이런 식으로 말을 퍼뜨리고, 그게 커뮤니티의 상식이 된다.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다.”

기무라 “우리가 겪는 걸 정확히 이해하려면 일제 식민지에 사는 조선인을 생각하면 된다. 난 양부모를 기분 좋게 하려고 ‘당신은 우리를 위해서 희생했어요. 당신이 날 구해줬고, 당신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했다. 양부모에게 보답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내 의무였다.”

정은 미국 시카고에서 자랐다. 지금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산다.

“그들(입양기관 관계자와 양부모)은 항상 ‘넌 양부모에게 감사해야 해. 안 그러면 넌 지금 한국에서 훨씬 나쁜 상황에서 살고 있을 것’이라고 반복해 말했다. 그런데 나를 위해 그렇게 (입양)했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들은 나에게서 부모, 가족을 빼앗아 갔다. 그들은 의사가 내 생부모에겐 ‘내가 죽었다’고 말했다고 했고, 나에겐 생부모가 나를 버리고 떠났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내 삶 전체가 사기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양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집담회에 참석한 기무라 별(왼쪽부터), 정 린 스트란스키, 숙, 은혜 김, 메리 바워스.
입양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집담회에 참석한 기무라 별(왼쪽부터), 정 린 스트란스키, 숙, 은혜 김, 메리 바워스.

정체성 혼란과 성적 학대

정체성 혼란은 일반적이다.

“고등학교 때 나에게 아시아 여자는 매력이 없다는 얘기를 계속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아시아인이라는 것도 몰랐다. 주변이 다 백인들인데 그들은 ‘넌 어떻게 그렇게 하얗니?’라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백인 혼혈인 줄 알고 살았다.”

괴롭히고 놀리는 말조차 자신이 속한 집단의 다수를 점한 인종적 특성을 인정하는 말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대학에 갔는데 흑인 친구들이 ‘너는 백인이 아니야’라고 정확히 알려줬다. 내가 변화의 길로 나아간 건, 그 친구들 덕분이다. 그들은 ‘넌 괜찮아. 우리가 우리 인종을 자랑스러워하듯 너도 네가 속한 인종을 자랑스러워해야 해’라고 말했다. 아시아인으로 정체성을 알게 해준 그 친구들이 정말 고맙다.”

은혜 “나는 내가 백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때, 그 잔혹함과 싸워야 했지만 좋았다. 내 현실에 대해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메리 “흑인과 백인 혼혈인 입양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역시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트라우마 극복에 아주 도움이 됐다. 살아오면서 많은 정체성 혼란이 있었는데 여전히 계속되는 것 같다. 어릴 땐 환경의 변화와 감정 등에서 정체성 혼돈을 경험했다면, 성인이 되면서 과도하게 동양인으로 성적 대상이 됐다는 걸 알았다. 그건 정말 두렵고, 공포스럽다.”

성적 학대에 직면했던 경험을 토로하자 모두 격하게 공감했다.

“어릴 땐 성적 학대가 너무 많았는데, 아시아 여자아이에겐 그게 일상이었다. 공포 그 자체였다. 성인 남자들은 길거리에서 ‘중국 소녀 이리 좀 와 봐’ ‘좀 더 가까이 와 보라니까’ 이런 식으로 희롱했다. 정말 무서웠다.”

“왜 항상 우리는 중국 여자애로 불렸는지, 나도 정말 혼란스러웠다.”

“내 또래 백인 네덜란드 아이들에게 그런 성적 학대가 일어나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한텐 너무 정상적인 일이었다.”

“예쁜 여자애 샀는데…넌 추해졌어”

참석자들은,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자 입양을 선택한 양부모 대부분이 백인 아이를 입양하고 싶지만 비용이 많이 들어 어쩔 수 없이 아시아인, 그 가운데 한국인을 택한다며, 양부모의 열패감과 분노에 노출된 자신들의 현실도 속속들이 드러냈다.

“내 양부모는 나에게 항상 ‘우리 아이를 낳으려 10년 이상 노력했는데 아이가 생기지 않아 너를 입양했다’고 말했다. 그 말에 엄청난 상처를 받으며 살았다. 그래서 ‘당신들이 날 선택할 권리가 있냐?’고 되묻곤 했다. 내 양부모는 흑인은 입양하기 싫고, 백인을 입양할 여유는 없고, 그래서 아시아인인 나를 선택했다고 했다.”

숙은 더 깊은 상처를 공개했다.

“내 양부모는 자신이 매우 영리했고 그래서 ‘나를 샀다’고 했는데, 그들에게 난 파손된 상품 같았다. 양부모는 나에게 ‘우리는 예쁜 여자애를 원했고, 예쁜 여자애가 좋아서 샀는데, 넌 추해졌다’고 말하곤 했다. 가장 최악은 ‘우리는 너를 돌려보내 환불하고 싶은데 그건 허락되지 않는다’며 그런 현실에 매우 흥분한 것이다. ‘우리는 너한테 갇혔어. 넌 추하고, 병들었어. 우린 이러려고 널 산 게 아니야. 매우 비싼 돈을 내고 널 샀으니까 너는 그만큼 일을 해야 된다’고 자주 말했다. 그래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하녀처럼 다른 가족을 챙겼고, 모든 잡일을 다했고, 난 지저분한 곳에서 살았다.”

정은 자신의 경험을 보탰다.

“그들은 백인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항상 (백인을 입양하는) 그런 상상을 하고 산다. 내 양아버지는 가끔 ‘넌 나한테 빚을 졌다’고 말했고, 날 산 게 암묵적인 거래라고 했다. 나에게 이 정도 돈을 들였다며 양아버지는 자기 인생에서 나에게 투자한 만큼 회수하는 걸 기대하곤 했다.”

기무라 “그들은 베트남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너무 말이 없고, 걔들은 베트남 전쟁 때 너무 잔혹했다고 말한다. 한국이 입양에 성공적인 건 그들이 한국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아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도 원하는 아이를 가질 (경제적) 능력이 안 된다는 것에 절망하고 스스로 분노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최선의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공식 같은 게 있다. 아시아 애들은 총명하고 공손하고 순종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순종적이라는 게 그들을 안심시키는 요인이다.”

무형문화재 이수자인 김혜경씨와 입양인들이 22일 민속극장 풍류에서 대동굿을 하고 있다.
무형문화재 이수자인 김혜경씨와 입양인들이 22일 민속극장 풍류에서 대동굿을 하고 있다.

불확실함 해소하려 ‘뿌리’ 찾지만…

입양인은 어느 순간부터 뿌리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성도 이름도, 생년월일도 정확하지 않다. 그래서 더 힘겹다. 그들은 생물학적 부모를 찾아야만 자신의 이런 불확실함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뿌리 찾기에 더 절실하게 매달린다.

은혜는 2001년 입양기관의 모든 자료를 검토한 끝에 가족을 찾았다. 기무라도 1991년에 생물학적 가족을 만났다. 정이 이번에 한국에 온 건 어머니와 만남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디엔에이(DNA) 테스트 웹사이트’를 통해 미국에 이민 온 사촌을 찾았고, 결국 엄마와 연락이 닿았다. 뿌리 찾기에 성공한 그를 축하하는 이들에게 그는 기대와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엄마 마음이 변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엄마가 내 요청에 결국 답한 것이지만, 모든 상황이 가능하다.”

4월27일 현재까지 그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지난 23일 만남이 약속돼 있었지만, 88살 할머니가 위중하다며 만남을 미뤘다고 했다. 정은 할머니가 입원한 병원으로 자신을 초대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카두 박찬호 대표에게 “할머니 이름과 병원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엄마 허락 없이 할머니를 찾을까 생각 중이에요. 한국인으로서 당신은 그것이 괜찮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끔찍한 생각인가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수십년의 세월을 찾아 헤맨 엄마와 만남은 이뤄질 수 있을까? 메리와 숙도 여전히 뿌리를 찾고 있다.

메리 “나는 맞는 게 하나도 없다. 엄마를 찾기 위해 실종자 찾기까지 하고 있는데, 내 기록은 이상한 점이 너무 많다. 입양기관을 알아냈고, 자료를 봤는데 내 성이 네개다. 미국 이민국 파일은 출생일 세개를 알려줬다. 그래서 더 어렵다. 나한테도 디엔에이 테스트가 유일한 희망이다.”

그는 울먹였다. 다른 이들도 한국인들이 디엔에이 데이터베이스 등록에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고 호소했다.

“어제(19일) 경찰에 가서 디엔에이 등록을 위한 절차를 밟고 왔다. 한국인들도 디엔에이 샘플을 등록해달라. 입양기관들은 너무 힘이 세 생부·생모로부터 아이를 찾는다는 편지를 받아도 입양인에게 자료 제공을 거부하고, 그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돈을 요구한다고 들었다. 우리에게, 또 우리를 찾는 부모 면전에서 거짓말하며 돈을 뜯어낸다고 한다. ‘당신 부모는 죽었다’, ‘당신 애들은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부모나 자식을 찾을 수 있겠나? 그들은 나에게도 그런 거짓말을 했다.”

숙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자신의 휴대전화로 한국 정부가 운영하는 디엔에이로 가족을 찾아주는 누리집(325KAMRA)을 보여주며 기사를 통해 널리 알려달라고 여러 차례 당부했다.

“앤세스트리 닷컴(ancestry.com) 같은 상업적인 디엔에이 테스트 웹에도 가족의 디엔에이 정보를 업로드해달라고 해야 한다.”

이들은 이런 디엔에이 정보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입양인이 사기 피해를 보지 않고, 수고로움을 줄이며 뿌리를 찾을 수 있는 희망이라고 역설했다.

한 방문객이 20일 관훈동 마루아트센터에 전시 중인 입양 예술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한 방문객이 20일 관훈동 마루아트센터에 전시 중인 입양 예술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입양 70년 ‘한국의 위선’

입양 70년, 한국인에게 쓴소리도 했다.

기무라 “우리 모두 한국 사회에서 리젝트(거부)당했고, 양부모한테도 리젝트됐다는 걸 느낀다. 외국으로 송출되는 건 우리가 선택한 게 아니다. 우린 버려져선 안 됐다.”

메리 “우리는 정의를 구현해야 할 범죄의 피해자다.”

외국으로 입양돼 자상한 양부모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다는 사례는 소수의 ‘신화’일 뿐이라고 이들은 지적한다.

“신화 같은 믿음이 있다. ‘못사는 나라에서 부자 나라로 보냈으니 넌 행운아다. 부모 잘 만나 학교도 다니고 공주 왕자처럼 살지 않았냐’고 믿는다. 내 현실은 전혀 행운아가 아니다. 유럽 신문에선 아이가 길을 잃으면 불쌍하다고 대서특필한다. 우린 신문에 난 길 잃은 아이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한국인들도 우리를 그렇게 생각해달라.”

은혜에겐 여권을 만드는 것조차 공포스러운 도전이었다. 생년월일, 이름까지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은혜 “시민권 문제로 많은 입양인이 강제 추방됐기 때문에, 한국에 오기 위해 여권을 만드는 것조차 한동안 망설여졌고, 용기가 필요했다. 양부모에게 필요한 서류를 부탁해도 즉시 해주지 않았다. 이런 불확실한 상태가 지속되면 추방당한다. 다행히 입양 때 이름으로 여권을 만들었지만, 난 지금도 이중국적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난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는 상태다.”

메리 “단지 이건 내가 뭘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행정적으로 악몽 같은 것이다. 그걸 바로잡는 건 정말 악몽처럼 어렵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정이 메리에게 다가가 안아주고 위로했다. 메리는 항의하듯 말했다.

메리 “솔직히 묻고 싶다. 이게 내 책임인가? 이런 얘긴 정말 호러픽하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단지 함께 분노해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분노하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난 내 생일이라도 정확히 알고 싶을 뿐이다.”

한국인의 외면과 위선도 직격했다.

“여러분은 우리가 입양기관, 가족, 의사의 속임수에 의해 밀반출된 것이라고 생각하나? 이건 시스템, 전체 시스템이 한 것이다. 나이 든 한국 사람들은 ‘우리가 애들을 팔았다’고 루머처럼 얘기한다. 그걸 숨기려 하지 않고 얘기한다. (입양에) 너무 많은 플레이어가 있고, 모든 사람이 그걸 알고 있다는 게 나를 정말 좌절하게 한다.”

기무라 “그들은 우리를 너무 먼 곳으로 보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한국 사람 전체의 멘털리티라고 생각한다. 아예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보내고, 우리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존재가 한국 사회의 치부라는 것, 한국이 수치스러워해야 한다는 것도 함께 제거해버린 것 같다. 한국은 평판을 중시한다. 그런 그들이 20만명이 넘은 아이들을 외국으로 입양 보냈다. 그래놓고 도대체 뭘 그렇게 평판에 집착하나? 난 한국 사람들이 우리한테 동정심을 갖길 바라지 않는다. 한국인 스스로 자신한테 동정심을 느껴야 한다. 나는 그런 변화를 원한다. 입양은 나에게서 부모를 빼앗아 간 것이다. 난 자발적으로 그런 선택을 한 적이 없다. 그건 (당신들이) 아이를 유기한 것이다.”

글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사진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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