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몬테네그로 수도 포드고리차에서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가 경찰의 호송을 받으며 법정으로 가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이냐, 한국이냐.
전 세계 가상자산(암호화폐) 투자자들이 보유한 ‘테라·루나 코인’을 개발한 권도형(32) 테라폼랩스 대표가 어느 국가로 송환될지 관심이다. 투자자 중 일부는 미국으로 송환될 경우 한국보다 더 중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이유로 미국 송환을 지지하고 있다. 법률 전문가들 역시 “권 대표라면 한국에서 재판받길 원할 것”이라며 이런 견해에 힘을 실었다.
지난 23일(현지시각) 몬테네그로 당국에 붙잡혀 구금된 권 대표가 송환될 국가로는 한국과 미국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한국은 권 대표의 모국이자, 권 대표에 대한 수사에 가장 먼저 착수한 국가다. 다만 기소는 미국이 더 빨랐다. 미국 뉴욕 남부연방지방검찰은 지난 23일 권 대표를 증권사기, 인터넷뱅킹을 이용한 금융사기와 시세조작 등 8개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이밖에 싱가포르 경찰도 권 대표를 수사 중이다. 권 대표가 어느 국가로 인도될지는 몬테네그로 사법당국이 결정한다.
국내 투자자만 20만명으로 추정되는 탓에 여론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권 대표의 미국 송환을 바라는 의견이 눈에 띈다. 2700여명이 가입한 ‘루나·테라 코인 공식 피해자’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공개 투표 결과를 보면, 28일 오전 9시 기준 투표자 122명 중 약 70%(86명)가 ‘미국 송환’에 응답한 한편, ‘한국 송환’은 약 15%(19표)에 그쳤다. “형량이 낮은 대륙법 체계인 한국보다 형량이 높은 영미법 체계의 미국에서 판결을 받아 죄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한국은 10년 정도 징역이지만 미국에선 종신형을 받아 감옥에서 죽을 수 있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법률 전문가들도 법체계를 따져봤을 때 미국에서 재판을 받을 경우 더 중한 형이 나올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미국은 여러 범죄를 저지른 경우 개별 범죄에 형을 매긴 뒤 합산하는 병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유기징역 상한도 없다. 650억달러 규모의 다단계 금융사기를 벌인 버나드 메이도프 전 나스닥 증권거래소 위원장에게는 150년형이, 70억달러 규모의 금융사기범 앨런 스탠퍼드 전 스탠퍼드 인터내셔널그룹 회장에게는 징역 110년형이 선고됐다.
반면 우리나라는 여러 죄를 저질렀을 경우 가장 무거운 죄에 내려질 수 있는 형의 2분의 1까지만 가중해 처벌하는 가중주의를 택하고 있다. 조정희 법무법인 디코드 대표변호사는 “권 대표가 미국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면 최소 수십 년형이 나올 가능성이 크다”며 “권 대표도 한국에서 재판을 먼저 받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했다.
가상자산(암호화폐) 테라·루나 폭락으로 전 세계 가상자산 약세장이 지속되고 있는 지난해 5월18일 서울 서초구 빗썸 고객센터 전광판에 비트코인 차트가 띄워져 있다. 연합뉴스
이런 법체계 때문에 국내에선 금융사기 피해자가 다수라 하더라도, 형량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특경법)에 따르면 사기 등 경제범죄로 취한 이득액이 50억원 이상일 경우 무기징역도 가능하지만, 이는 총 이득액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개별 사건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무법인 우리의 김정철 대표변호사는 “쉽게 설명하면 1만명에게 총 1조원의 사기 피해를 주더라도, 피해자들 각각의 피해액이 5억원 이하면 단순 사기죄로 15년(10년형의 2분의 1 가중) 징역밖에 못 내린다는 것”이라며 “양형 기준에도 사기 피해자의 규모와 관련된 세부 기준이 없다”고 했다.
범죄 성립에서도 미국이 더 용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에서는 암호화폐인 테라·루나가 증권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권 대표를 미 연방 증권거래법상 사기 및 미등록 증권 판매 혐의로 뉴욕 연방지법에 제소했으며, 미국 검찰도 권 대표가 미국의 투자회사를 통해 기존에 알려진 대로 알고리즘이 아닌 인위적인 시세 조종으로 가격을 유지한 경위를 공소장에 적었다. 김동환 법무법인 디라이트 변호사는 “미국은 이미 암호화폐가 증권이라는 예를 여럿 축적해 왔으므로 시세 조종 혐의와 관련해 처벌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말했다.
아직 국내에선 암호화폐의 증권성을 입증한 판례가 없다. 한국 검찰이 루나·테라를 증권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해 지난해 권 대표에게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가 적용된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게 전부다. 다만 김정철 변호사는 “권 대표가 국내로 송환돼 재판을 받는다면 법정에서 암호화폐의 증권성을 처음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권 대표가 어느 나라로 송환되든 국내 피해자가 구제받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조정희 변호사는 “권 대표가 숨겨둔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형을 확정한다 하더라도 실제 피해자에게 돌아갈 정도의 피해재산을 몰수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며 “피해자들 역시 이를 알고 처벌이 중할 것으로 보이는 미국에서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정철 변호사도 “권 대표가 한국에서 재판을 받게 될 경우, 재판 과정에서 일부 피해액을 변제하는 등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을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 피해액 회수까지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우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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