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동 고전번역원 명예교수가 지난 3월23일 전남 구례군 광의면 지상마을에서 박경현 의사 추모비와 태극기마을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지난 23일 오전 전남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 지상마을회관 앞에는 저마다 태극기를 손에 든 주민 수십명이 보였다. 이곳은 104년 전 구례만세시위를 이끈 박경현(1859∼1923) 의사가 태어난 살던 곳이다. 마을주민들은 ‘대한독립 만세’,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구례군 만세’를 차례대로 외쳤다. 이날부터 지상마을을 ‘태극기마을’로 부르기로 하고 박경현 의사 추모비 앞에서 태극기 게양식도 했다. 마을 입구에는 길을 따라 태극기 50여장이 바람이 흩날렸다.
박경현을 다시 불러낸 이는 마을 출신이자 후손 박소동(75) 고전번역원 명예교수다. 지상마을은 지난해 전남도의 ‘아름다운 마을만들기’사업에 선정되며 태극기마을을 추진했다.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 지상마을
매천 황헌·제자인 박경현 고향
1919년 구례만세시위 주도 ‘순국’
지난해말 귀향한 박 교수 ‘제안’
최근 추모비 단장 만세운동 재현
“한·일관계 보며 ‘정신’ 알리려”
지난 3월23일 전남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 지상마을 주민과 김순호 구례군수, 박임규 구례경찰서장 등이 104년 전 구례 만세시위를 재현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지난해 말 귀향한 박 교수는 단순히 마을 길에 태극기만 내걸 게 아니라 박경현 정신을 끌어들여 구례의 의로움을 알리자는 의견을 냈다. 주민들은 물론 구례군(군수 김순호)과 구례경찰서(서장 박임규), 도의원, 군의원, 순천박씨종친회 등이 한마음으로 이날 태극기 게양식에 맞춰 구례읍 봉성산 자락에 있던 추모비를 마을회관 앞으로 이전했고 추모비 내용과 태극기마을 유래를 알리는 안내판도 새롭게 설치했다.
박 교수는 “구례의 인물은 매천 황현(1855~1910)만 알려졌는데 같은 마을에 살았던 매천의 제자격인 박경현의 의기도 높았다”며 “요즘 엉터리로 흘러가는 한·일 관계 속에서 박경현 정신을 되새기는 자리로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1919년 박경현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3월23일 태극기를 종이에 그려 이튿날 구례읍 장터에서 홀로 만세를 외쳤다. 환갑의 원로였던 그는 “지금 각처에서 조선독립을 절규하고 있는데 구례에서는 한 사람도 독립을 외치는 이가 없으니 매우 유감된 일이다”고 꾸짖었다. 일본 헌병이 몽둥이로 한차례 때리자 “때려도 좋다 만만세”를 외쳤고 두대째 때리자 “죽어도 좋다 만만세”를 더 크게 외쳤다. 세 번째 매질에 쓰러지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어 구례 만세운동을 촉발했다. 박경현은 징역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고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3년 8월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며 독립유공자로 지정했다.
박 교수는 박경현이 황현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봤다. 박경현은 황현의 스승 왕석보(1816~68) 일가와 후학들이 1907년 세운 호양학교 1기 졸업생이다. 황현은 1910년 8월29일 ‘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자 9월8일 “나라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정작 나라가 망해도 죽는 선비가 한명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은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박 교수는 “황현의 자결을 보고 박경현도 죽음을 무릅쓰고 만세시위에 나섰을 것”이라며 “매천의 말을 빌리면 구례는 ‘탄환만 한 작은 고을’이었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옥’(폐쇄적인 지형)같은 곳이었지만 의식 있는 지식인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이번 행사를 계기로 구례의 인물과 정신을 본격적으로 널리 알리겠다는 계획이다. 조만간 호양학교에 평생의 연구 자료를 기증해 공유하고 후학도 기를 생각이다.
박 교수는 “요즘 한일 관계를 보면 자존심이 많이 상한다”며 “오늘 만세 행사를 ‘씨앗’ 삼아 꺾이지 않았던 구례의 민족정신을 온 국민이 되새겼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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