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양천구 신목동 파라곤아파트 모습. 이 아파트는 공사비 분담 문제로 시공사가 유치권을 행사해 입주를 막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20년 서울 양천구 신목동 파라곤아파트 청약에 당첨된 이아무개(51)씨는 지난달 28일 입주 예정이었지만 현재 임시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시공사가 원자재 가격 인상 등을 이유로 재건축 사업자인 조합에 공사비 약 100억원을 더 요구하면서 유치권을 행사해 분양자들의 입주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사를 앞두고 전입신고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차량등록까지 마친 이씨는 “중도금과 잔금, 관리비까지 다 냈다. 서류상으로도 법적으로도 내 집인데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녀의 중학교 전학 수속도 다 밟아놨다가 이사가 무산되면서 이씨의 자녀는 마포구에 있는 기존 학교를 계속 다니고 있다. 당장 오갈 데가 없어진 이씨 가족은 임시 숙소를 간신히 구해 지내는 형편이다. 예정대로라면 벌써 이사가 끝났어야 하지만, 이삿짐은 14일에도 실외에 방치된 상태다.
서울지역 재건축·재개발 사업장 곳곳에서 공사비 증액 문제 등으로 사업자(조합)와 시공사(건설사)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입주 예정자들이 피해를 겪고 있다. 이삿날 당일 입주가 가로막힌 이씨 사례는 극단적이긴 하지만, 준공을 앞둔 서초구 반포 래미안원베일리(삼성물산)와 강남구 대치푸르지오써밋(대우건설) 등도 시공사가 공사비 증액을 요구하면서 조합과 갈등을 빚고 있다.
양쪽의 타협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파라곤아파트 시공사 동양건설산업 관계자는 “급격한 자잿값 인상, 화물연대 파업 등으로 모든 비용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 400억원 이상 손실을 봤다”며 “전부 요구할 수 없으니 건설물가지수를 반영해 최소 금액인 약 100억원을 보전해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조합 쪽은 “소비자물가지수로 계산했을 때 약 30억원대를 증액하려고 하는데, 시공사가 일반 분양자들을 볼모로 조합을 협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합은 건설사의 유치권 행사에 대해, 지난달 서울남부지법에 업무방해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이르면 이번 주중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조합과 건설사의 ‘고래 싸움’에 ‘새우등’ 예비 입주자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 파라곤아파트 예비 입주자 박현주(47)씨도 자녀 2명을 매일 은평구 집에서 양천구에 있는 초등학교와 유치원까지 ‘왕복 2시간’을 등하교·원에 시간을 쓰고 있다. 박씨는 “이런 상황에서 일반분양자를 보호할 법과 제도가 아무 것도 없다”며 “주변에 ‘청약하면 망할 수 있다’, ‘청약하면 길거리 나앉으니 절대 하지 말라’고 말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전문가들은 한동안 재건축 재개발 사업장에서 공사비 증액의 여파가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분쟁이 되는 사업장들은 코로나19 이전에 자잿값 급등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을 때 계약을 맺은 곳이다. 몇년 전 계약을 맺은 다른 사업장에서도 당분간 비슷한 분쟁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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