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정부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가 일본기업에 청구한 배상금을 국내기업 돈으로 지급한다는 방안을 제시하면서 피해자들이 어렵게 받아낸 승소 판결을 무력화시켰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앞서 박근혜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을 방해해 재판을 장기화시켰는데, 윤석열 정부는 10년 만에 받아낸 대법원 승소 판결의 취지를 무력화한 셈이다. 일본기업으로부터 배상도, 사과도 받지 못하게 된 피해자들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싸워야 할 상황에 놓였다.
현재 대법원에서 승소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의 법정 다툼은 한국에서만 햇수로 13년이 걸렸다. 1997년 일본법원에 소송을 냈던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2003년 패소 확정판결을 받자 2005년 한국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1·2심은 “일본 판결의 효력이 한국에서도 인정된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지만, 대법원은 2012년 5월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일본기업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한 위자료청구권”이라며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의 위자료청구권까지 해소됐다고 볼 수 없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대법원 취지에 따라 2013년 7월 “일본제철은 피해자에게 각 1억원씩 배상하라”며 처음으로 강제동원 피해자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일본제철이 판결에 불복해 재상고하면서 공은 다시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해법을 발표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그러나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대법원의 재상고심 판결은 박근혜 정부와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로 예상을 뛰어넘어 장기화했다. 한·일 관계 경색을 우려한 박근혜 정부는 판결을 미루거나 판례 변경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요구했고, 양승태 사법부는 당시 숙원 사업이었던 상고법원 설치 등을 요구하면서 이에 호응한 정황이 당시 법원행정처 문건에서 드러난 것이다. 대법원이 2012년 판단한 취지대로 파기환송심이 판결했음에도, 재상고심 결론이 나오는데 5년 가까이 시간이 걸려 2018년 10월에야 원고 승소 판결이 확정됐다. 심리불속행 기각(4개월 안에 본안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것)을 기대했던 고령의 피해자들은 결국 승소 판결이 확정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 6일 제시한 ‘제3자 변제안’은 이런 진통 끝에 확정된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무시한 방안이다. 불법행위를 한 일본기업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과 무관하게, 한국기업이 일본기업을 대신해 손해배상액을 지급하고 피해자들의 채권을 소멸시킨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2018년 패소판결 확정 뒤에도 손해배상을 거부하고 있는 일본기업을 상대로 국내 자산을 현금화하는 강제집행 과정을 진행 중인데, 정부는 이 사안을 심리 중인 대법원에 ‘문제 해결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내 피해자 쪽으로부터 “재판개입”이란 반발을 사기도 했다. 사실상 사건 처리를 지연해 달라는 요청 아니냐는 것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정부 발표 뒤 “왜 윤석열 정부가 일본 강제동원 가해 기업의 사법적 책임을 면책해주고, 피해자들의 권리를 인정한 2018년 한국 대법원 판결을 무력화시키느냐”며 비판 성명을 냈다. 강제동원 사건을 대리하는 김정희 변호사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정부의 이번 결정은 대법원 판결에 반한다. 법률의 최종적 해석 권한은 사법부에 있는데, 정부가 대법원 판결 취지를 몰각하는 것은 삼권분립 원칙에 반하는 것”이라며 “피해자의 거부 의사를 무시하고 (판결금) 공탁이 이뤄진다면 무효를 다툴 계획”이라고 밝혔다.
신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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